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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Dec 26. 2020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뮤지컬 : 노트르담 드 파리

공연장소 :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공연기간 : 2015년 1월 15일 - 2015년 2월 27일

관람시간 : 기억 안 남. 기록 없음.




     나는 뮤지컬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1년에 2-3편 정도는 보는 편인데 (물론 코로나 시대 이전에), 개인적으로 손꼽는 뮤지컬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노트르담 드 파리], [헤드윅 (헤드윅은 뮤지컬보다는 연극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도이다. 세 작품 다 누구나 알고 있는 명작이니 내가 뮤지컬 애호가가 아니라는 게 드러나는 셈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평소 1998년 버전을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접했다가 2015년에 오리지널 팀이 방한했을 때 2번이나 보았다. 그 당시에 너무나 만족스러워서 이번에 오리지널팀이 또 공연한다는 소식에 바로 예매를 했다. 코로나가 위중한 시기에 어떻게 방한이 성사되었는지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일단 이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노트르담 드 파리] 오리지널팀의 공연을 볼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얼굴에는 마스크 2개를 쓰고 양손에 쌍소독약을 들고서라도 꼭 보러 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12월에 들어 코로나가 1000명 대에 육박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공연 주최측으로부터 예매 취소 통지를 받았다. 2자리를 띄우고 좌석을 다시 예매할 수 있다는 추가 메시지가 있었지만 감히 다시 예매하지는 못했다. 1000명이 넘는 코로나 확진자 수치는 내 고집으로 꺾을 수 없는 고지였다.

     아쉬운 마음에 2015년에 보았던 [노트르담 드 파리]의 기억을 되살려 감상을 써볼까 한다. 사실 2015년이라는 것도 인터파크로 검색해 보고서야 안 것인데 한 3년 정도 되었는 줄 알았더니 벌써 5년이나 지난 모양이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한 데다가 1998년 버전 동영상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사실상 내 감상은 1998년 버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5년 전 현장에서 직접 느꼈던 감동이야말로 내 감상을 밀어 올리는 원동력이다.

     나는 보통 아무리 화려하고 대규모 물자가 투입된 뮤지컬이라고 해도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인상을 받곤 하는데 [노트르담 드 파리]는 프랑스 예술의 집합체이자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완성도가 뛰어났다. 그것은 그저 돈이 많다거나 훌륭한 예술가가 있는 것만으로는 이룩할 수 없는 오래된 예술적 경험과 실험의 축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내 취향으로 보자면 다소 정통적이고 고전적이었지만 완성도는 언제나 취향을 뛰어넘는 법이다. 빅토르 위고의 대작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의 탄탄한 이야기와 인물 구성을 기반으로 현대 무용과 과감한 무대 장치, 무엇보다 단 한 곡도 허투르지 않은 음악까지 어우러져 흠잡을 곳이 없었다. 특히 뮤지컬은 뮤직-컬(Music-al)이라는 이름 그대로 음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노트르담 드 파리]의 음악은 - 음악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 - 대중적이면서도 감성 전달 면에서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뮤지컬들은 괜찮은 대표곡 하나만 걸어놓고는 나머지 곡들은 어영부영 때우기 식으로 지나가기 마련인데 [노트르담 드 파리]는 곡 하나하나가 뮤지컬 전체를 탄탄하게 받혀주고 있는 뼈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 뮤지컬의 가장 뛰어나고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이야기, 문학성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대성당'으로 상징되는 폐쇄적인 종교 국가 안에서 자폐적으로 변해버린 사회가 이민자들의 새로운 문화와 자유로운 사상을 만나면서 번민하고 충돌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영혼을 대변하는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에게 사랑을 느끼는 사제와 기사와 하층민은 모두 자신들의 사회 구조의 모순을 대변한다. 얼핏 보면 이민족의 문화의 영향에 의해 타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치 남자를 유혹하는 집시 여인의 치마폭에 빠지듯이) 실은 그들은 새로운 정신 앞에서 자신들의 모순과 내적 타락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이교도 여인에게 이룰 수 없는 연정을 품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제 프롤로, 이교도의 여인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배신하고 사제에게 협력하는 기사 페뷔스, 집시 여인을 지키고 싶었지만 아무런 발언권도 힘도 없었던 꼽추 콰지모토. 이들은 모두 대성당의 돌기둥 같은 존재들로서 그들의 파멸은 대성당의 몰락을 암시한다. 그들은 위대한 종교와 문명을 완성하고 거대한 성을 쌓아 도시를 보호하고 무기와 도덕심으로 단단히 무장했지만 아름다운 여인 한 명 앞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그저 한없이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뮤지컬인데도 불구하고 그 각자 구성원들의 고뇌와 고통이 음악과 어우러져 섬세하고 강렬하게 잘 드러난다. 특히 사제의 고뇌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데 그는 단지 시대적 인물을 대변하고 상징하는 캐릭터에서 벗어나 영적인 쾌락과 인간적인 쾌락 사이에서 번민하는 인간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고통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은 에스메랄다의 죽음과 함께 세기말적 슬픔과 구원을 기원하는 바램이 합쳐지면서 그 어떤 종교나 문명이나 신념보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애정을 거룩하고 신성하게 승화하며 끝을 맺는다.

     이 뮤지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은 아무래도 '시인'일 것이다. 그는 아주 독특하고 매력적인 인물로 이 이야기 진행에 아무 상관이 없으면서도 이 이야기 전체를 끌고 나간다. 그는 이 이야기의 화자이자 관찰자이며 참여자로서 시대정신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뮤지컬의 포문을 여는 것도 시인이요, 인물들 주위를 맴돌며 그들의 희로애락을 관찰하고 경청하고 경고하는 것도 시인이며, 결국 관찰자라는 안전하지만 오만한 자리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내려와 가장 약한 자들의 목소리가 되는 것도 시인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쯤에 항거하는 이민자들과 함께 시인이 전진하면서 이민자들의 외침에 코러스를 넣어주는 장면은 언제나 짜릿한 희열을 느끼게 한다. 시대는 언제나 강한 자들의 편 같지만 실은 시대를 넘어서 전진하는 자들의 편이며 사람들은 사라져도 그 이름 없는 발자국들은 분명하게 남는 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 작품 안에서의 다소 단순한 관점이며 실제 현실에서는 더 다양하고 복잡한 이슈를 내포한다.) 

     코로나 때문에 공연을 보지 못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 나는 이제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조바심조차 내려놓았다. [코로나 시대에 연극은 사라지는가]라는 글에서 나는 "노우"라고 외쳤지만 조금 자신이 없어진다. [코로나 시대에 연극은 사라지는가 2]를 써볼까 하는데 그때도 "노우"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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