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by 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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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파트릭 모디아노




모든 소설가가 그런 건 아니지만 - 그리고 그게 꼭 장점이나 단점은 아니지만 - 어떤 작가들은 매우 구체적으로 특화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다. 파트릭 모디아노도 그런 작가인데, 나는 그의 몇 작품을 읽어봤지만 모두 약간씩 변형된 비슷비슷한 주제와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 나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건 어쩌면 탁월한 제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은 기억 상실증에 걸린 남자로 이 소설은 그가 자신의 과거를 추적해 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어찌 보면 3류 소설의 소재 같기도 하지만 - 그리고 진행과정은 다소 그런 점이 있지만 - 그 안에 배어있는 정서는 마치 깊고 어두운 물속처럼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우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포함해서 내가 읽어 본 그의 소설의 결말은 하나같이 놀라울 정도로 허무하고 시시하다. 그가 찾아 나선 그의 과거에 엄청난 비밀이나 놀라운 비극이 숨어 있던 것도 아니어서, 그저 '그렇게 되었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그의 소설에서는 결말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결말이 거창했다면 이 소설은 말 그대로 3류가 되었을 것이다. 주인공이 과거를 쫓는 건 거기에 쫓을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현재나 미래보다 과거에 이끌려 마치 뒤로 걷는 것처럼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뒤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상이 이 소설 전체에 짙게 배어있다.

이 소설에서는 결말이 중요하지 않은 것만큼이나 실상 주인공의 정체 역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주인공 자체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바로 이것이 이 소설의 매우 독특한 점이다. '나'라는 것은 결국 '나를 아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며, '과거'라는 것도 온통 '과거를 공유하는 사람들'로 점철된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여러 사람들 사이를 유령처럼 떠돌아다니지만 그것은 주인공 자신의 유령이라기보다는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과거의 유령이다. 이 소설은 얼핏 '1인칭 주인공 시점'인 듯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진정한 주인공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인 화자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정체를 추적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주인공에게 질문을 받고 갑작스럽게 자신의 과거와 맞닥뜨린다. 나이가 들어버리고, 외모도 삶도 변해버리고, 꿈도 의지도 퇴색해버린 그들은 자신의 젊은 날들을 회상하고, 죽었거나 헤어진 친구들의 오래된 이름들을 떠올리고, 아직까지 간직해 두었던 낡은 사진과 편지들을 꺼내어 들여다보고, 여기저기서 주워 들었던 소문들을 주워섬기고, 마치 다른 사람의 얘기를 하듯이 자신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립지만 낯선 자신의 과거와 조우한다. 그 사람들은 마치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는 과거로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천천히 허우적거리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들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는지도 모른다. '미로'란 앞만 보며 걷다가 돌연 뒤돌아 보았을 때 진정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자신만의 미로가 있지 않나. 한 번도 꺼내보지 않으면서 버리지 못하고 쌓아놓은 사진들이나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사라진 사진들, 은밀히 간직해 둔 편지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들, 누구도 물어보지 않는 사연들, 되돌릴 수 없는 후회들, 그 시절의 일기와 짧게 갈겨놓은 메모들, 소식을 알 수 없는 친구들,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람들의 부고들, 우리가 꿈속에서 헤매는 어두운 거리들.....

문제는 이 소설에서 결말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보니 뒤로 갈수록 이야기를 끌어가는 동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추리소설처럼 물고 물리며 이어지는 증거와 복선의 퍼즐에도 불구하고 점점 흥미를 잃어서 마지막에 가서는 억지로 페이지는 넘기는 꼴이 되고, 실제로 결말 또한 예상했던 대로 시시하게 끝을 맺으며 김이 빠져버리고 만다. 차라리 추리극 같은 형식을 다소 덜어내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작가가 추리소설 형식을 선호하는 듯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 책에서 스티오파 드 자고리에프의 에피소드를 가장 좋아한다. 사실 그 에피소드가 드러내는 분위기와 정서가 이 책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티오파 드 자고리에프는 자신이 뒷면에 일일이 메모까지 해가며 붉은 과자 깡통 속에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사진들을 - 온통 죽거나 사라진 사람들의 사진들을 - 아낌없이 주인공에게 넘기고는 홀로 안갯속으로 사라진다. 그는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해졌을까. 사진 속의 사람들, 그들은 서로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남은 것은 사진들 뿐.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그 많은 사진들은 결국 우리가 사라지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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