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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Nov 24. 2020

밤과 안개



Nuit Et Brouillard / 밤과 안개 (1955) 





몹시 피곤한 어느 날의 악몽처럼


무력한 흑백의 장면들이 지나간다.


그것은 어떤 감정보다도 순수한 놀라움으로 시작한다.


상상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 어떤 밑바닥.


인간은 어디까지 사물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어지러운 인간성이란 걸 쭉 짜내버리면


거기에 뭐가 남아있을까.


바짝 말라붙은 등뼈, 동그랗고 단단한 머리, 텅 빈 눈꺼풀.


뒤엉킨 머리털 사이로 보이는 뾰족한 이빨. 


우리는 사실 내심 궁금했지. 


우리의 냉담함을, 우리의 잔인함을, 우리의 증오를,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호기심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 


인간이 의지를 통해


얼마나 멀리까지 자기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지.


이제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강인한지를 본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보고


무엇이든 즐길 수 있다는 것도 본다.


영혼의 부질없음과 신의 부재에 대한 얘기는 지긋지긋할 뿐.


대체 누구에게 호소해야 할지 모르겠어.


피해자에게? 가해자에게?


죽은 자에게?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곳에


방치되어 있는 것처럼


몹시 피곤한 어느 날의 악몽에서는


내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죽은 자인지 알 수 없는


무력한 흑백의 장면들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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