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뮈엘 베케트
이 희곡은 셰익스피어나 그리스 희곡을 제외하고는 내가 처음 읽었던 희곡이거나 혹은 대충 그런 느낌이 들게 한다. 말하자면 그만큼 잘 알려진 희곡이고 '고전'의 반열에 올라간 희곡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생생하고 신선했던 추억도 세월이 지나면 퇴색하고 마는 것처럼 이 희곡도 나에게는 상당히 색이 바랬다.
이것은 나에게 일면 조각가 [로댕]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한다. 로댕의 작품들은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현대의 반열 위로 끌어올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도된 아름다움과 새로운 감각의 기준을 탐색하는 현대성과는 계열을 달리하는 것도 사실이다. 말하자면 로댕의 작품들은 고전과 현대의 경계에서 완성과 미숙을 모두 대변한다. '고도를 기다리며' 역시 그와 흡사한데 (로댕이 그렇듯이) 주제와 형식 양쪽에서 모두 그렇다. 무엇보다 신의 재림을 기다리는 인간이라니,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신, 신을 기다리는 사람들, 예수, 구원의 약속.... 설사 전복된 형태일지라도 이런 기독교적인 패러디 자체가 이미 단물이 빠질 대로 빠져서 식상하기 그지없다. 물론 아직도 인류의 대부분이 어떤 형태로든 - 내 주변의 사람들 중 몇몇 도 -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게 (혹은 종교를 수호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들의 믿음은 진실하며 그들에게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종교가 진리이고 또 엄연한 현실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 시대가 그렇듯) 선천적으로 무신론자이며 설사 종교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개인적이고 다채로운 성적 취향처럼 지극히 사생활의 영역 혹은 정체성의 문제일 뿐이다. 더 이상 인류의 공통 관심이나 실존의 조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공공연히 떠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코미디도 풍자도 아닌 이토록 뻔뻔한 진지함이라니. 나무는 베어버린 지 오래되었는데 그 나무에 목을 매겠다고 나무를 찾아 헤매는 형국이다.
이 작품을 '부조리극'이라고 하는 것에도 나는 크게 공감하지 않는다. 그런 요소들이 없지는 않지만 '부조리극'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문학적으로 너무 소심하고 또 협조적이기 때문이다. '부조리적인 면이 있다'거나 조금 양보해서 '부조리극의 아동판'이라고 거드는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보수적이라고 할 만하다. '보수적'이라는 게 원론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그리 칭찬도 아니다. 유년기로 회기 하려는 듯한 천진하지만 식상한 나약함은 세심하게 잘 다듬어진 이 작품에 씁쓸한 맛을 남긴다.
쓰고 나니 온통 비난 일색처럼 되어 버렸지만, 그래서 설득력도 개연성도 떨어지겠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이 희곡을 좋아한다. 문제는 내가 이 작품을 싫어하는 것만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부정적으로 지적했던 바로 그 부분들을 내가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향수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이 희곡은 나의 향수를 자극한다. 그 특유의 순수함과 섬세함이 내가 한 번도 가져본 적은 없지만 이미 잃어버린 믿음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아주 어렸을 때 들어서 이제는 까맣게 잃어버린 옛날이야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