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et Oppenheim 메레 오펜하임
태초에는 찻잔이 없었다.
우리가 찻잔으로 쓰기 위해 찻잔을 만들고 그것을 찻잔이라고 이름지었다.
다시말해 찻잔은 찻잔으로 쓰는 찻잔을 일컷는 말로
찻잔으로 사용하는 찻잔을 찻잔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찻잔으로 사용하는 찻잔을 찻잔이라고 부르는 건 이것이 바로 찻잔이기 때문이다.
찻잔이라고 부르는 찻잔을 찻잔으로 쓰지 않거나
찻잔으로 쓰는 찻잔을 찻잔이라고 부르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정상과 이상(異常)은 지극히 우리의 영역이다.
물체에게 정도란 없으며 존재에게 이유란 없다.
물체는 존재함으로 존재자가 된다.
그러나 먼저 존재자가 됨으로서 존재하게 된 우리는 그만 주눅이 들어서
찻잔을 찻잔으로 사용하고 찻잔이라고 부르면서 찻잔 안에 찻잔을 가두어 두려고 한다.
이제
찻잔이 찻잔인 척 하기를 그만둔다.
찻잔이 찻잔으로서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다.
찻잔이 더이상 찻잔이 아닌데 여전히 찻잔일까.
우리는 찻잔이 아닌 찻잔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별안간 이름이 물체의 유령이 된다.
우리는 갑자기 낯선 물체들, 온전한 물체들,
물체들에 둘러싸인다.
우리는 소외되고, 의심스러우며
우리의 이름은 수치스럽다.
정말 태초에 찻잔이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