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음 이 책을 중고 책방에서 구입하면서 화장실에서나 심심풀이로 읽을 생각이었다. 얼핏 보면 우화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동화 같기도 한 것이 글도 긴 편이 아니어서 가볍게 생각했다. 그저 동물들에 대한 목가적이고 순진한 감상 같은 것이겠지. 지루하지만 천진난만한 글도 가끔은 나쁘지 않을 거야. 제목조차 무신경하고 평이하지 않은가. 그러다가 몇 장 읽지 않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무 재미있어서. 애초에 내 생각이 틀린 건 아니었다. 우화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목가적이고 순진한 감상. 그런데 뭐가 그리 재미있느냐고?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한담?
일단 놀란 나는 대체 작가가 누구인지 책 표지 뒷면부터 살펴보았다. (내가 작가를 궁금해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홍당무'의 작가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나는 '홍당무'를 읽지 않았다. 그러나 '홍당무'라는 책의 제목 정도는 내게도 익숙한 걸로 봐서 유명한 작가인 모양이다. 사실 이 책의 주제는 유명 작가에게는 걸맞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다. 전원생활 속에서 접하게 되는 흔한 동물들, 예를 들면 오리, 칠면조, 비둘기, 암소, 말, 당나귀, 돼지, 종달새, 참새, 거미, 나비, 개미 등등에 대해 쓰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이 동물들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나 묘사는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보통 다른 작가들은 대자연의 풍광을 배경으로 동물들의 야생적인 생태를 그리곤 하지만 그런 의도는 이 작가의 머릿속에는 좁쌀 한 톨만큼도 들어있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인간에게 대체 객관화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냐라고 일갈이라도 하듯이 지극히 주관적인 인상에 오롯이 집중하는 데 그것이 참으로 재치 있고 기발하며 비범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는 우화나 동화, 연극, 시, 에세이 등등의 문학적 기술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독자를 웃게 하고, 감탄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한다. 어떤 이들은 이 글이 소박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지나치게 현란해서 어지러울 지경이다. 제목은 [자연의 이야기들]이지만 이건 온전히 그의 이야기이며 어쩌면 자연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이것은 분명 [자연의 이야기들]이 맞다. 그가 멋대로 인격화 시키고, 의미를 강요하고, 문학적으로 소모시킨 동물들은 분명 '자연적'이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그들은 그의 글 속에서 더 강한 생명력으로 그에게 멋지게 저항하고 있지 않은가.
그가 전원의 동물들에 대해서 썼다고 해서 마냥 그것들을 찬양했을 거라고 지레짐작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의 자연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인간이 있는데, 그 인간이 문학에 닳고 닳은 작가일 때에는 문제가 꽤나 얄궂어진다. 그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새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새들이 가까운 가지에 앉기라도 하면 천진한 기쁨에 가슴이 설레고, 그러다가 옳다구나 하면서 옆에 기대어 두었던 총을 집어 들어 새를 겨누고, 자신이 총을 발사하기 전에 새가 도망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러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총을 발사하고, 재미로 잡은 새를 허리띠에 차고 집으로 돌아가며 의기양양하고, 그 새를 감자와 함께 푹 끓여 뼛조각 한 마디마디까지 쪽쪽 빨아 맛있게 먹어치우고, 잠자리에 누워 죄의식과 후회로 번민하는 그런 - 인간다운 - 인간이다. 그는 극단적일 정도로 동물들을 의인화시키는 몽상가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결코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는 걸 철저하게 체득하고 있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의 글 속에서 양립할 수 있느냐고? 그러게 말이다.
하긴 이런 말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의 설명이 그의 글을 잡스럽게 어지럽히고 있다. 그는 그저 짐짓 한 마디 할 뿐이다. '당나귀는 어른이 된 토끼다.' 만약 당신이 나처럼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지 않았다면 나와 당신 중 누군가는 잘못된 게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공작'에 대한 그의 재기 발랄한 글을 소개하며 이만 총총히 마무리하려 한다. 아, 가기 전에 경고할 것이 있는데, 이 책은 의외로 뻔뻔하게 슬프다. 마치 천천히 올라오는 매운맛처럼 당신은 책을 덮으며 혀를 내두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