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빈드 욘손
나는 다른 작가의 책을 읽다가 우연히 그 안에서 욘손의 글을 접하고 이 책을 사게 되었다. 그것은 짧게 인용된 토막 글이었지만 내게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 종종 그렇듯 - 그건 변역가의 재주인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욘손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소설들은 정말이지 희한하기 그지없었다. 소설의 소재가 독특하거나 줄거리가 드라마틱한 것도 아니었다. 지적이거나 심오하거나 유려한 것도 아니었다. 소박하고 심지어 투박하다고까지 할 만 한데 그것이 또 어리숙함이나 미숙함은 아닌 것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김유정의 글을 읽었을 때의 충격과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소재로, 이렇게 이야기 같지도 않은 이야기로, 이렇게 멋들어지고 유쾌하며 완성도 높은 글이 나올 수 있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김유정의 글은 내 취향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어떤 반열에 오르면 취향을 넘어서는 법이다. 독보적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으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내게는 욘손의 글 또한 그랬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스웨덴식 결혼]이다. 이 글은 정말이지 무지막지하게 재미있다. 이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내가 언급한 '무지막지'라는 단어에 백번 공감할 것이다. 나는 도대체 이 정도로 무지막지한 글을 본 적이 없다. 글의 내용은 별 게 없다. 그저 촌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시골 결혼식 일화일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수도 있는가. 음주가무라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우리마저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마치 그들과 함께 결혼식에 참석하여 독한 독주를 연거푸 퍼마신 것처럼 얼떨떨해진다. 그래, 인생에 뭐가 있나. 짐짓 인생의 의미 따위를 찾아 헤매는 샌님들은 진짜 인생의 의미를 결코 찾아내지 못하리라. 먹어라. 마셔라. 사랑하라. 토할 때까지. 그리고는 더러워진 입을 다시 술로 헹구며 호탕하게 웃어재끼면 될 게 아닌가. 우리는, 최소한 뼛속까지 도시 사람인 나는, 이러한 정서를 모두 잃었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고, 소리 지르고, 울어본 적이 있는가.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 소설을 읽으면 속이 뻥 뚫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소설은 [사랑하는 친구 테미스토클레스]이다. 이 글 역시 내용은 별 게 없다. 굳이 요약하자면 '가진 것 없고 장애까지 가진 한 비천한 남자의 비애'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얼마나 흔해 빠졌는가. 문학적으로 보자면 치트키라고 할 만큼 쉬운 소재라고도 할 수 있다. 공감과 동정과 죄의식을 강요하면서 도덕적 우위를 점유하려고 하는 얄팍한 글들이 주변에 넘치고도 넘친다. 그런데 특별한 기교도 없는 욘손의 글이 독보적인 것은 그가 자신의 글의 등장인물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바로 등장인물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그것이다. 그것은 그의 글 안에 언어로 명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글 밖에, 그러니까 그 글의 여백 같은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그 여백 위에 쓰여져 있다.
우리는 등장인물들을 갈가리 찢어서 사람들 앞에 보란 듯이 널어놓는 글에 익숙해져 있다. 나 역시 그런 글을 좋아한다. 냉소적이며 가학적인, 마치 의사가 관중들 앞에서 산채로 사람을 해부하듯 한 글자 한 글자 칼처럼 예리하게 휘두르는 글들. 작가는 함부로 그리고 전능하게 등장인물의 몸을 가르고 헤집는다. 보라. 이 사람은 간이 썩어 들어가고 있군. 심장은 부풀어 오르고, 폐는 돌처럼 굳고, 위에는 궤양이 생겼군. 그리고는 불필요하고 치욕스러운 부분까지 남김없이 까발리며 우리의 관음증을 자극하면서 우리를 공범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등장인물은 애초에 해부의 재료로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그저 글로 이루어진 꼭두각시 캐릭터일 뿐이 아닌가. 그러나 욘손은 자신의 등장인물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 그는 등장인물들을 자신과 동등한 타인으로 마주한다. 함부로 그들의 치부를 까발리지도, 그들의 감정을 멋대로 재단하지도, 그들을 단정적으로 평가하거나 과장하거나 박제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의 소설 속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며, 그들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 그들이 입을 다물면 함께 침묵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가슴속 깊이 크게 숨을 들이켠다. 그들은 자신의 세계 속에서 안전하며 주체적이다. 그들에게는 그들 자신의 삶이 있고 사생활이 있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고뇌가 있다. 설사 그것이 소설로 쓰여지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소설이 그들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야기를 창조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을 이해할 수 없음으로써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등장인물에게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냉담해지지 않는다는 건 작가로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 이전에 그것은 한 사람으로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욘손은 그것을 버티어 낸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타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소설 전체에 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건강함을 부여하며 감상성을 피하면서도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래, 그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그 온기다. 인쇄기로 찍어낸 검은 활자가 온기를 가진다는 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다. '온기'라는 단어에 정말 온기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시시껄렁하고 유머러스한 짧은 글에서마저 일종의 경건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 온기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욘손의 글을 읽을 때면 우리의 머리와 손이 얼마나 차가워져 있는지 깨닫게 된다. 인생이 뭐 있는가. 살아있다는 건 단지 따듯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출판된 욘손의 책이 이 한 권뿐이라는 게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