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단턴
나는 이 책을 꽤나 오래전에 읽었었는데 얼마 전에 다시 꺼내 읽고는 새삼 즐거웠다. 이 책은 극악의 기억력을 가진 내가 '재미있다'라고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책 중에 하나다. 하지만 그 재미를 설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듯하다. 문학작품처럼 이 책도 시시콜콜 설명하려 들면 그 매력이 심히 반감되어 버릴 것 같다.
우선 이 책은 혁신적이고 영리하며 영감을 주는 동시에 - 비교적 - 대중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독서하는 맛'이 난다고 평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 같다. 끊임없이 입맛을 당기는 건 물론이고 포만감까지 준다. 요리란 단지 기술도 아니고 단지 예술도 아닌 그 둘의 긴장이며 조화라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요리는 만드는 자와 먹는 자 사이의 끊임없는 작용과 반작용의 구축이다. 요리는 결코 일방적일 수 없으며 적당히 상대를 속일 수도 없다. 재료 준비와 조리, 완성된 요리를 접시에 담아 내놓는 것을 넘어 상대방이 그 요리를 먹고 맛을 음미하는 순간까지 모두 요리의 과정이라고 볼 때, 소통이야말로 요리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라고 할만하다. 그것은 윤리적인 소통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직감적인 소통이다. 요리를 먹는 사람은 요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론할 필요가 없다. 그저 맛있다, 혹은 맛없다, 그도 아니면 그저 미간의 찡그림 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쩌면 독서 역시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이 책은 맛있다.
이 책은 18세기 프랑스 사람들이 남긴 문헌들을 기반으로 그 시대의 정서와 사고방식을 연구한 책이다. 저자는 그 시대 일반의 정서를 포착하기 위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쓴 글들을 임의적으로 선택한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도 밝혔듯이 이 책은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는가 보다는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추적해 나가는 여정이다. 저자는 왕들의 역사, 정치와 전쟁의 역사, 사상의 역사와 대비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연구를 '문화의 역사'라고 규정하고 있다. 아마도 누군가는 이러한 방식을 '아래로부터의 역사'라고 표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표현에 반대한다.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라는 말처럼 문화에 있어서 '위'와 '아래'를 대비하여 상정하는 건 오래된 사고 습관이다. 그러나 문화에 있어서 '아래'란 없다. 그것은 편이주의적이거나 엘리트주의적인 구분일 뿐이다. '위'와 '아래'의 비유는 중력이라는 물리적 조건을 기반으로 하는데, 그 물리적 세계에서는 물이 오직 위에서 아래로만 떨어지며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문화란 그런 것이 아니다. '아래' 세계는 '위' 세계의 상황과 의지에 따라 자동적이고 기계적으로 형성되는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고립되어 있지 않고 최종적이지도 않으며 무기력하거나 순종적이지도 않다. '아래' 역시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생기이고, 요구이고, 시선이고, 목소리이다. 그것은 '위'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으며 피할 수는 더더욱이나 없는 실질적인 파동이다. 나는 함부로 '동등한'이나 '평등한'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겠다. 그 둘의 세계가 대칭인 것처럼 묘사하지도 않겠다. 더군다나 세계는 단 두 개의 구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수많은 세계들로 이루어진 정교하고 섬세하며 입체적인 망과 같다. 그 망은 얽히고 겹치고 부딪히면서 함께 출렁이고 있으며 뒤섞이고 혼탁해지고 때로는 함께 끓어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사람들은 - 어느 계층의 사람들이든 누구나 - 자신의 시대에 흠뻑 젖어있으며, 그것과 싸우고, 타협하고, 협조하고, 일조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시대를 대표한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그 대표성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정립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그래서 '역사'는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무시하고 모른 척해왔다. 실존적인 삶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실존'이나 '삶'이야말로 가장 비학문적인 단어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이 책의 재미와 어려움이 있다. 그 시대의 내밀한 정신세계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어쩌면 거의 강신술에 가까운 시도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도가 문학적이고 임의적이며 자칫 주관적이고 작위적일 수 있다는 의심은 당연한 것이다. '역사 소설'이나 '역사 영화'가 얼마나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연구 방식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면서도 그 상상력을 제어하고 검열해야 하는 고통을 수반하며, 공감을 요구하면서도 냉담하고 낯설어져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연구 방식을 '인류학적 접근 방식'이라고 칭한다. 인류학은 그저 '원주민'의 환경이나 사회, 종교, 관습을 나열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의 '실제 세계'를 재구성하고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것이 신화가 인류학에서 그토록 중요한 이유이다. 원주민의 조망이 세계를 구성하며 세계의 조망이 원주민을 구성한다. 그것은 결코 분리할 수 없으며 그리하여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지극히 사회적인 것'이 되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역사학은 결국 그 시대의 개인의 텍스트에 온전히 의지하는 수 밖에는 없다. 역사가 문학이나 언어학, 혹은 지극히 개인적인 개성, 기벽, 심리의 모호함 속에 매몰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분명 이것은 학문적으로 비난받을 여지가 있다. 과연 '역사'란 무엇이며 어디까지 관용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런 건 학자들끼리 싸우도록 내버려 두기로 하자. 분명한 것은 독자 입장에서 이러한 접근 방식이 독서 자체를 무척이나 풍요롭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종합 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다. 이성과 감성 그리고 공감이 신중하게 어우러진다. 무엇보다 상상력과 상상력에 대한 두려움이 필요하다. 나는 이 글에 나오는 모든 쳅터가 다 좋았지만 특히 -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 '고양이 대학살'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그것은 18세기 인쇄소 노동자 니콜라 콩타가 쓴 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내가 놀란 것은 니콜라 콩타의 예민한 감수성과 글솜씨이다. 그는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과 시대를 꿰뚫어 보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 시대 인쇄공들과 인쇄공 견습생들의 삶은 고되고 비참했다. 그들은 전문 기술자이고 장인이며 어느 정도 계몽되어 있었고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그러나 태동하기 시작한 자본 노동 시장의 경쟁은 비인간적으로 치열했고 공동체는 점차 붕괴되어 갔으며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비천하고 불안정한 데다가 그들을 짓누르는 세속적 차별은 가혹했다. 불합리하다는 것은 분명했으나, 무엇보다 모두가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고 더 나은 것을 예감하고 있었지만, 세계는 거대한 기계처럼 무지막지한 힘으로 모든 것을 묵살하며 굴러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콩타는 '인쇄공들은 웃는 법을 알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인쇄공들은 웃었고 콩타는 그것에 대해 글을 썼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라졌고 콩타는 남았다.
'웃음'과 '글쓰기'는 어쩌면 가장 반대의 극단에 놓여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웃어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 허공에 날려버릴 수 있다면, 털고 잊을 수 있다면, 미련 없이 죽을 수 있다면, 우리는 글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글을 쓴다.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왜 웃는가.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도저히 웃어버릴 수 없기 때문에 글을 쓰고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웃어버린다. 그 웃음이야 말로, 그냥 웃어버리고 사라진 사람들이야 말로, 결코 역사가 재구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진짜 '역사'인지도 모른다. 그 웃음은 세상의 가장 내부에서부터 무너져버린 세상이며 전체를 집어삼키는 작은 점이다. 블랙홀이다. 물리학이 통하지 않는 물리학이다. 언어가 철저하게 해체되는 곳이다. 분노와 광기의 씨앗이다. 거대 역사의 발단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심연이다. 어쩌면 인간은 역사와 문화와 사상과 예술과 과학 등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질질 끌면서 그 웃음 주변을 아슬아슬하게 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이 책이 하고자 하는 일이다. 그리고 독서라는 것도 바로 정확하게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