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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un 24. 2022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보았을 연극 - 9 (上)



   코로나 확진자가 1000명 아래로 내려가면 다시 연극을 보러 갈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언제 그런 날이 올지 정말 막연하기만 하다. 한 때는 일주일에 두 편씩 연극 리뷰를 올린 적도 있었는데, 더 이상 연극을 보지 않으니 리뷰를 쓸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보았을 연극]이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연극 제작 자체가 줄어든 탓에 내 관심을 끄는 연극도 줄어들어서 더 이상 이런 글마저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저번 8편에서는 연극이 아니라 연극 포스터에 대한 잡글만 길게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 후 나는 2달이 넘도록 연극에 대해서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버려 두었다. 이참에 그냥 연재를 접어버릴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인터파크에 들어갔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보고 싶은 연극이 넘쳐나고 있었던 것이다. 코로나 시국이 정리되면서 (아직도 확진자가 만 명 가까이 육박하고 있지만) 연극 시장도 다시 활기를 띄는 모양이었다. 일단 좋은 연극들이 다시 제작되어서 다행이고, 나 역시 연재를 계속할 수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내가 다시 연극 공연을 보러 갈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 이제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외출하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처럼, 솔직히 나는 밀폐된 지하 공간에 사람들과 다닥다닥 붙어 앉아 1시간 넘게 공연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다. 누군가 기침이라도 한다면 그만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릴 것 같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강박증이라고 하지만, 강박은 언제나 일종의 예지력이다. 봐라. 원숭이 두창이 또 몰려온다고 하지 않는가?.




* 나는 이번 글에서 9편의 연극에 대해 쓰려고 했다. 아마도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보았을 연극]의 회차 중에 가장 많은 편 수일 것이다. 그만큼 관심이 가는 연극이 많았다. 그런데 글을 쓰던 중에 두 연극의 공연 종료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글을 다 쓰려면 시간이 더 걸릴 듯한데, 그렇다고 이미 끝난 공연에 대해 글을 올리는 것도 우스워서 이 두 편만 먼저 올린다.







연극 : 웰킨

공연장소 :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

공연기간 : 2022년 6월 07일 ~ 2022년 6월 25일



   우선 이 작품은 단박에 페미니즘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요즘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프래임이 덧씌워져있긴 하지만 - 그리고 그것은 다분히 페미니즘 자신의 과오가 크지만 - 어쨌거나 나는 매우 건조하게, 거의 기술적으로, 이 단어를 쓰고 있다. 유지의 딸이 하녀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12명의 여자 배심원들이 심사를 한다는 게 이 연극의 내용이라고 하니, 작품을 관통하는 페미니즘적인 의지는 노골적이라고 하겠다. 더구나 살인자인 하녀가 아이를 임신했다는 설정은 주제의 여성성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지역 유지의 딸인 피해자와 그녀의 하녀인 살인자의 관계를 통해 빈부나 계급에 관한 공정의 문제도 다루어질 듯 하나 아마도 그것은 작품의 중심에 서지는 못할 것이다. 자, 여기까지는 쉽게 예상이 되는데 과연 실제 작품은 어떤 모습일까? 그저 진부한 '자매애'를 내세우며 여성의 불공정한 위치와 입장에 대한 고발과 계몽을 촉구할까? 몇 백 년 전인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며, 남자들은 각성하고 여자들은 연대하라- 구호를 외치면서?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을까? 연극에 페미니즘을 욱여넣는 건 괜찮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연극을 욱여넣는 건 불편하다. 이것은 모든 예술과 이데올로기에도 동등하게 해당한다. 그러나 언제나 중요한 것은 구체성이다. 하나의 대사, 한 번의 눈빛, 한 차례의 행동으로 모든 게 달라진다. 연극이 페미니즘을 잡아먹는지 페미니즘이 연극을 잡아먹는지 한 번 확인해보고 싶다.









연극 : 파묻힌 아이

공연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공연기간 : 2022년 6월 15일 ~ 2022년 6월 26일



    나는 이 희곡 책을 오래전에 사두고 아직 읽지 못했다. 이런 경우 좀 고민하게 되는데, 책을 읽고 연극을 보는 게 좋을까, 연극부터 보고 책을 읽는 게 좋을까. 책을 읽고 가면 연극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질 것이고, 연극부터 보면 책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질 것이다. 어느 쪽이든 선입견은 피할 수 없을 것이나 나는 간발의 차로 연극부터 보는 쪽을 택할 것이다. 어쨌든 연극을 보기 위해서는 제법 많은 수고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좀 더 실존에 집중할 필요를 느낀다. 그런데 과연 연극에 '실존'이란 게 있을까? '실존'과 '실존적 기분'은 전혀 다른 것일 텐데.

    이 연극은 패륜과 살인으로 극단화된 가족의 지옥, 아니, 가족이라는 지옥 자체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패륜과 살인만으로는 지옥이 되지 않는다. 가족은 패륜과 살인 없이도 충분히 지옥일 수 있으며, 본질적으로 지옥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은 가족을 이룸으로서 죄를 짓고 타락하고 정상을 벗어났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가족'이란 얼마나 비현실적이며 심지어 초현실적인가. 거울처럼 꼭 닮은 서로를 매일매일 바라보면서 찰싹 달라붙어 있으면서도 온갖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과 금기와 윤리가 그들 사이를 갈라놓고 쑤셔놓는다. 단언컨대 부모 자식 간에 - 서로 동의하에 - 성관계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최소한 윤리적으로는 말이다. 그러나 성관계를 하던 하지 않던 너무 가깝다는 것은 이미 비윤리적인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려고 발버둥 치지만 결국 다시 가족에게로, 혹은 또 다른 가족에게로 추락한다. 지옥이 바로 우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닮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막장의 가족 안에서 우리 자신의 지옥이 열리는 걸 지켜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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