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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ul 13. 2022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보았을 연극 - 9 (下)



     지난번, 보고 싶은 9편의 연극 공연 중에 공연 종료를 앞둔 연극에 대해 먼저 쓰느라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보았을 연극 - 9 (上)]을 올렸었는데, 그 뒤로 게으름을 피우는 바람에 [보이지 않는 손]과 [잔인하게, 부드럽게] 두 편의 연극이 종료되고 말았다. 써놓은 것은 있지만 이미 지난 공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도 의미 없는 - 그것도 보지도 않은 공연에 대해 - 일이어서 삭제하고 한 편을 더 추가해서 6편에 연극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연극 : 느릅나무 밑의 욕망

공연장소 : 한성아트홀 2관

공연기간 : 2022년 7월 15일 ~ 2022년 7월 17일




     솔직히 말해서 만약 정말 내가 연극을 보러 갈 셈이었다면 이 연극을 고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공연 기간이 너무 짧은 연극은 선택하지 않는다.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지만 2-3일 공연할 연극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완성도를 높였을까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파일럿 프로그램'처럼 시험 삼아 뚝딱 만들었거나 공연장 예약 틈새를 노리고 급조한 연극이 아닐까 하는 찝찝한 기분이 든다. 이 포스터만 봐도 - 나는 포스터를 유심히 보는 버릇이 있다고 누누이 밝혔듯이 - 딱히 심혈을 기울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욕망'에 대해 집중하는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보러 갔을지도 모르겠다.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바라는 욕망,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바라는 욕망, 그 사이에서 엇갈리고 방황하고 갈등하는 인간들, 그리고 '비밀'이라는 욕망의 다른 이름.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고 왜 욕망하는지도 모른 채, 다만 욕망의 힘으로 삶을 뜨겁게 불태우고 싶어 한다. 마치 불길이 우리의 결핍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처럼. 그게 안된다면 최소한 결핍을 새까맣게 태워버릴 수 있는 것처럼. 욕망은 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달려가지만 결코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도망가지는 않는다. 마치 우리 자신의 그림자같다. 









연극 : 달콤한 노래

공연장소 :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

공연기간 : 2022년 7월 1일 ~ 2022년 7월 17일



     이 연극에 대한 정보는 별로 많지 않다. 다만 홍보용 줄거리를 읽었을 뿐이다. 중산층 가정의 인테리 부부. 보모. 그리고 살해된 두 아이. 자, 일단 이것만으로도 가십적이든 이념적이든 스릴러적이든 흥미를 자극하는 건 사실이다. 살인자는 누구인가. 살인의 동기는 무엇인가. 주인공은 누구이며, 이 이야기의 중심은 어디인가? 무엇보다 제목은 왜 [달콤한 노래]일까? 직접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연극 : 아일랜드

공연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공연기간 : 2022년 7월 9일 ~ 2022년 7월 17일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설득] - 홍보 문구가 자못 비장하다. 담론이 너무 거대해서 흥미가 급속도로 떨어진다. 이 '인간적'인 연극에 대한 좀 더 소심한 설명, 좀 더 구질구질한 표현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었을 텐데. 홍보 사진에서 보이는 감옥 벽에 갈겨진 낙서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줄거리는 충분히 흥미를 유발한다. 정치범들이 수용소에서 연극 공연을 준비하는 중에 벌어지는 여러 가지 상황들과 사건들. 개인적으로 '연극 속의 연극' 같은 액자식 구성이나 대사의 이중적 해석과 사용을 좋아하기 때문에 기대가 된다. 다만 너무 비장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연극 : 스트립티이즈

공연장소 : 뜻밖의 극장

공연기간 : 2022년 6월 30일 ~ 2022년 7월 24일



    이 연극은 수갑이 채워져 방에 감금된 사람들이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옷이 벗겨지는 상황을 묘사한 블랙코미디라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일단 티켓을 끊을 이유는 충분하다. 부조리극다운 부조리극을 본지 너무나 오래되었다. 부조리극을 더 부조리하게 뒤틀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부조리극을 쉽고 조리 있고 대중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아마추어적인 연극에는 신물이 난다. 다만 나를 불안하게 한 것은 이 작품에 대한 제작자의 설명이다. [작품의 주제와 의도를 위해 남자 인물을 여자 인물로 바꾸고]-? 왜 작가가 애초에 남자로 설정해 놓은 인물을 여자로 바꾸는 것이 작품의 주제와 의도를 위해 더 좋다는 것일까? 아니 아니, 설마 여기에 페미니즘을 끼얹으려는 건 아니겠지? 예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페미니즘을 싫어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언제나 정당하다. (어쩌면 영원히 정당하리라는 게 문제의 핵심이긴 하지만) 그러나 페미니즘에게 남자에 대한 증오만큼이나 예술에 대한 증오 역시 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우기도 쉽지 않다. 물론 '인간'의 대표가 꼭 남자일 필요는 없다. 그러니 작가가 주인공으로 굳이 남자를 선택했다고 해도 주인공을 여자로 바꾸는 것에 대해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그러나 만약 주인공인 여자가 인류의 대표가 아니라 여자의 대표로 한정된다면 이것은 조금 다른 얘기가 된다. 그리고 작가의 -  주인공을 여자로 바꾸는 것에 대해 흔쾌히 찬성했을지도 모르는 작가의 - 의도를 배신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아, 혹시 어쩌면 반대로 '옷'이란 결국 여자의 영역이고 옷이 벗겨져야 한다면 이왕이면 여자인 게 좋겠다는 지극히 '반'페미니즘적인 발상은 아니겠지? 흠, 만약 그렇다면 오히려 페미니즘보다는 흥미로울 것이다.








연극 : 카사노바

공연장소 : 국립정동극장_세실(서울)

공연기간 : 2022년 7월 14일 ~ 2022년 7월 24일



     이 연극에 대해서도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 왜 관객에게 주는 정보를 이리도 아끼는지 모를 일이다. 거기다 그나마 이 연극이 홍보용으로 제공한 줄거리 역시 지나치게 간략한 데다가 건조해서 딱히 흥미를 유발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 연극을 꼽은 이유는 무대 배치가 독특했기 때문이다. 무대 중간중간에 관객석이 마련되어 있는 데 정확하게 어떤 의도인지는 모르겠다. 관객의 시선과 위치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일까. 아니면 관객이 연극 안에 실제로 참여하게 되는 것일까. 어쨌든 포스터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하니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연극 : 죽음혹은아님

공연장소 : 대학로 공간아울

공연기간 : 2022년 7월 27일 ~ 2022년 7월 31일




     이 연극도 정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진짜 아무것도. 이걸 신비주의라고 해야 하나.  [시놉시스]라고 적어 넣고는 


     1막 : 7번의 죽음과

     2막 : 7번, 혹은 그 이상의 아님


     덜렁 이게 다다. 공연 기간도 짧고, 포스터도 성의 없고, 정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사실 보러 갈 마음이 들지 않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 연극을 꼽은 것은 '아님'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대체 무엇이 아니라는 것인가. 삶이? 죽음이? 인생이? 거기다가 [죽음 '그리고' 아님]이나 [죽음 '그러나' 아님]이 아니라 [죽음 '혹은' 아님]인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단지 이 '아님'이라는 단어에 이끌려, 혹은 단지 이 '아님'이라는 단어에 멱살이 잡혀 공연장까지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만약 재미가 없기라도 한다면 이 연극을 향한 나의 '아님'은 단지 7번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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