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애주의자 (1)

by 곡도




나는 단지 힘을 원했습니다.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 질 드 레 (Gilles de Rais)



정호는 오늘도 저녁 늦게까지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고객들의 상품 문의에 일일이 답글을 달고 있었다.


[어머, 저도 고객님처럼 종아리가 잘 부어요. 핏줄도 좀 튀어나온 편이랍니다.ㅠ_ㅠ 고객님이 문의하신 A형 압박스타킹은 두께가 두꺼운 편이어서 처음 신으시는 분들은 조금 불편하실 수도 있어요.;; 그러나 효과는 정말 쪼아요. 확실히 다리가 덜 부을 뿐만 아니라 보정 효과까지 있답니다. 신어 보시고 언니도 예쁜 다리 만드세용.~*^o^*]


정호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여성용 스타킹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직원도, 동업자도, 심지어 제대로 된 사무실도 없었지만 그의 매출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의 원룸과 지하실 창고에는 팬티스타킹, 밴드스타킹, 판타롱스타킹, 망사스타킹, 반스타킹, 압박스타킹 등등 여러 가지 종류의 색색가지 스타킹들이 가득 차있었다. 상당량의 스타킹들이 매일 팔려나가고 있었지만 팔린 물건보다 더 많은 스타킹들이 매주 입고되었기 때문에 스타킹은 계속 쌓여갔다. 사실 그는 스타킹을 팔아 번 돈의 대부분을 다시 스타킹을 사는데 쓰고 있었다.

정호의 하루 일과는 단순하고도 분주했다. 오전 10시쯤 일어나 씻는 둥 마는 둥 컴퓨터부터 켜고 밤사이에 들어온 주문을 확인했다. 아침 겸 점심 식사로 끼니를 때우면서 노닥거리다가 정오가 되면 주문받은 리스트를 가지고 지하 창고로 내려가 스타킹을 포장했다. 주문량은 보통 하루에 50개에서 100개 정도였다. 일은 간단했지만 종류와 색깔, 사이즈, 개수 등을 꼼꼼히 확인하며 포장해야 했기 때문에 몇 시간씩 소요되기 마련이었다. 보통 너 댓 시간 정도 상품을 포장하고 나면 5시에 택배 기사가 와서 물건들을 가져갔다. 그 후 저녁때까지는 인터넷에 올릴 상품 사진을 찍거나 찍은 사진들을 편집하며 시간을 보냈다. 7시쯤 저녁을 먹고 나서 인터넷 쇼핑몰에 올려진 상품에 대한 질문이나 소감 글들에 답글을 달고 나면 비로소 하루 일과가 끝났다.

그때부터 새벽 2시까지 그는 보통 영화를 보곤 했다. 대부분의 요즘 젊은이들이 자처하듯 정호 역시 영화광이었다. 그는 영화를 사랑했고 또 영화 속 인물들을 사랑했다. 정호에게 있어 영화 속 인물들은 실제 사람들보다 더 생기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이야 말로 진정 사람다웠고, 그들에 비하면 실제 사람들은 감정도, 생각도, 고뇌도 희박한 물건들처럼 밋밋하게 느껴졌다. 영화 속 인물들은 실제 사람들이 흉내 내고, 배우고, 닮아가야 할 천연의 표상이었다.

정호가 이런 생활을 한지도 벌써 4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멀쩡히 대학까지 나온 놈이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할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며 한심해했다. 더구나 고등학교 교사라는 번듯한 직업까지 때려치우고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 생활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임용 고시를 통과해서 2년 정도 고등학교 교사 노릇을 해봤지만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고 - 그의 부모는 이 ‘적성’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 그는 그것을 지금껏 손톱만큼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학생들 앞에서 어른인 척 어깨를 펴고 이러쿵저러쿵 인생에 대해 조언한다는 게 그로서는 견딜 수 없었다. 차라리 한 푼 두 푼의 돈에 울고 웃는 비린내 나는 장사치의 생활이 그에게는 훨씬 홀가분했다. 더구나 인터넷 쇼핑몰은 혼자 고즈넉이 일할 수 있어서 번거로울 것도 치사할 것도 없으니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늘 태평하던 그가 최근 들어서는 불안한 사람처럼 안절부절 이었다. 평온하던 그의 이마도 불연 듯 찌푸려지고 영화조차 예전처럼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어떤 생각 때문이었다. 그 스스로가 떠올린 생각인지 아니면 어디에서 전염된 생각인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느 틈엔가 슬그머니 자리를 잡더니 야금야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렸다. 이제 그는 온종일 그 생각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고 있었다. 그 생각이란 사람을 죽여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비둘기 고기는 무슨 맛일까’, ‘색맹에게는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무해한 호기심 말이다. 그런데 ‘왜’를 연발하며 답을 얻기 전에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는 그만 그 자리에 단단히 못 박혀버리고 말았다. 대체 사람을 죽인다는 건 어떤 걸까?

그렇다고 그가 사방에 피를 뿌리거나 살을 찢거나 내장을 파헤치는 식의 가혹한 쾌감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만약 그가 원한 것이 그 정도였다면, ‘살인 참극’ 류의 다큐멘터리나 스너프 같은 동영상에 열중했을 것이다. 사실 그가 처음 스너프를 봤을 때는 그 영상이 하도 충격적이고 강렬해서 자신이 원하는 게 바로 이게 아닐까 착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냉정을 찾고 보니 오히려 그가 원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스너프는 죽음보다는 가학에,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화면은 이상할 정도로 무관심하고 인색했다. 낱낱이 까발려지는 피해자의 뻔한 고통과 공포 뒤에서 살인자는 늘 신비하고 불가침한 존재였다. 거기다 더욱 그의 신경을 거슬렀던 건 살인자가 피해자를 개돼지 같은 가축을 처리하듯 냉담하게 대하거나 혹은 장난감을 부서뜨리는 아이처럼 함부로 군다는 점이었다. 그는 그런 살인자에게는 아무런 공감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 행위는 혐오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그가 동조하는 살인자는 절망, 분노, 공포, 성적 욕구, 심리적 마비, 무지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하찮게 여겨서 죽이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살인자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과 감정을 가진 보통 사람,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또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게만큼이나 타인의 존재의 무게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했다. 과연 그런 사람이 조건 없이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게 무엇인지, 한마디로 자신 같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게 어떤 건지 정호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요즘 전문가들이 어떤 범죄에나 손쉽게 들이대듯, 그의 살인에 대한 흥미 역시 영화의 영향일까? 그가 보는 영화들에 다소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들이 섞여 있는 건 사실이었다. 전문가들은 그가 컴퓨터에 소장하고 있는 ‘네크로맨틱’이나 ‘텍시더미아’, ‘복수는 나의 것’과 같은 영화들에 주목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에게 영향을 받아서 살인에 흥미가 생긴 건지, 아니면 살인에 흥미가 있어서 그런 영화들을 봤던 건지, 아기 때부터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인 정호에게 이것은 닭과 달걀의 문제였다. - 하긴 이 세상의 가장 중요한 일들은 모두 닭과 달걀의 문제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 처음 한동안은 정호도 자신의 살인 욕구의 원류를 찾기 위해 고심해보았다. 범죄심리학 책을 몇 권이나 뒤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결국 진이 빠진 채 포기하고 말았다. 설사 원인을 알아낸다 해도 한 번 자리 잡은 생각을 머릿속에서 떼어내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곰팡이처럼 머릿속을 온통 물들여버려서 도저히 뿌리째 뽑아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헤집으면 헤집을수록 더 부풀어 올라 머릿속 구석구석까지 기어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결국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오직 살인에 대해서만 골몰하게 되었다. 두 손으로 목을 조르고, 칼로 가슴을 가르고, 벽돌로 머리를 내리찍고, 물속에 얼굴을 처박아 넣고, 독극물을 코 속으로 흘려보내는 등의 상상을 하면서 그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찔거렸다. 버둥거리는 사지, 뒤틀리는 목덜미, 영문을 알 수 없어 휘둥그레진 눈동자, 쥐어짜는 눈물, 끓어 넘치는 신음을 떠올리며 그는 소극적이고 죄의식에 가득 찬, 그러나 한편으로는 뭉클한 쾌감을 맛보았다. 한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일의 무게는 과연 얼마만큼일까,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은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인간인가, 과연 거기에 ‘그 너머’라는 것이 있을까. 이런저런 의문들을 수백 번씩 곱씹어 보면서 그는 견딜 수 없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피자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피자 맛에 대해 논할 수 있겠는가.


[아이는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있다.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울음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고급 양초처럼 하얗게 질려 가늘게 숨을 몰아쉴 뿐이다. 그때 한쪽 구석에서 희미한 빛이 비치더니 한 남자가 등불을 들고 나타난다. 등불에 반사된 남자의 얼굴이 태양처럼 빛나는 듯하다. 그는 차가운 돌바닥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에게 말한다. “아가야, 이제 괜찮으니 걱정 말아라.” 그는 아이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춘다.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며 남자에게 안긴다. 두려움과 설움이 눈물과 함께 녹아내린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남자에게 미소 짓는다. 그 순간 남자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아이의 목에 꽂아 넣는다. 충격과 고통으로 인해 아이의 입이 쩍 벌어진다. 거꾸러지는 아이의 몸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오른다. 남자는 단도를 던져 버리고 경련하는 아이를 품에 안는다. 아이의 이마에 자신의 볼을 부비며 왈칵 눈물을 쏟는다. 그의 굵은 눈물방울이 핏기 없는 아이의 콧잔등 위로 떨어진다. 아이가 숨을 거두는 순간 그는 몸부림치며 오열한다. 그러나 아이의 몸이 식기도 전에 그는 등불을 높이 쳐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옆방에도, 그리고 그 옆방에도, 지하 감옥은 아이들로 가득 차 있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맴돈다.]


이야기 속의 남자는 희대의 살인마로 알려진 질 드 레 였다. 어디선가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정호는 질 드 레를 그저 극악한 정신병자로만 여기고 흘려 넘겼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내내 그의 마음속 변두리의 어느 모퉁이들을 간질이며 기어 다녔고, 살인에 대해 본격적으로 흥미가 생긴 후에는 진지하게 숙고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질 드 레가 냉혹하고 위선적이며 감정이 없는 사이코 패스라고 단정했다. 그를 짐승이나, 괴물, 혹은 악마라고 편한 데로 불렀다. ‘악마의 놀이터’라는 영화는 질 드 레를 아이들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주사위처럼 가지고 놀려했던 초인적이고 타락한 노름꾼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정호는 그들과 생각이 달랐다. 그는 그 이야기의 모든 순간순간이 다 질 드 레의 진심이었을 거라고 믿었다. 다정함도, 잔인함도, 자비도, 절망도, 단호함도, 망설임도, 슬픔도, 그리고 기쁨까지도 말이다. 질 드 레는 겁에 질린 채 자신의 품 안에 안겨있는 무방비한 아이를 살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바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 연약하고 귀한 목숨을 끊어 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인간이라는 절대적인 살덩어리 안에 쑤셔 넣어진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하고, 두 손아귀에 쥐어보고, 철저하게 배반하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가장 밑바닥까지 내동댕이친 다음 다시 그것을 끌어안고서 허무함의 끝까지 가보는 것, 그것이 질 드 레의 의지였다. 자신이 죽여 버린 아이들의 시체 위에서 홀로 일어서듯이 자신 안에서 철저하게 홀로 되는 것, 그것이 질 드 레의 바램이었다. 정호는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질 드 레를 이해하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호는 이제 밤마다 사람 죽이는 꿈에 시달렸고 실제로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점차 도취되었다. 냉정함만 잃지 않는다면 완전 범죄가 그리 어려운 건 아니었다. 요즘 과학 수사니 심리 수사니 거창하게 떠들어 대지만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수사관들이 치밀하고 여유롭지는 않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은 살인자가 수사관보다 기민했고, 밝혀지는 살인보다 밝혀지지 않는 살인이 더 많았다. 사실 살인자에게 약간의 배짱만 있다면 수사관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쫓기는 것이 아니라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체포되는 자들이 많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그들은 지독히도 운이 없거나, 지례 자포자기했거나, 못 말리게 멍청한 경우일 것이다. 운이 없는 거야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자포자기하는 것은 심약하기 때문이든 예술적 기질 때문이든 사적인 문제이니 남이 가타부타할 일이 아니지만, 주의가 부족하거나 생각이 짧아서 덜미가 잡힌 거라면 참으로 한심하고 난감한 일이었다. 가령 안면 있는 사람을 살해 대상으로 택한다거나, CCTV에 버젓이 얼굴이 찍힌다거나, 피해자의 머리카락 따위를 차에 남긴다거나, 나중에 자신의 범죄 현장을 기웃거리는 식의 당치않은 짓들 말이다. 그들은 진정 수치심을 느껴야 마땅했다. 몇 개월 전에도 한 여성을 살해하고 도주했던 범인이 피해자의 검은색 구두 한 짝을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다가 체포되어 떠들썩했던 적이 있었다. 참으로 순진하고 미련한 인간 아닌가. 정호는 텔레비전에서 사람들의 손가락질 사이로 어깨를 웅크리며 끌려가는 범인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죄가 중하더라도 한 명의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이 절실히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 혹은 그것을 했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짓밟히는 건 딱한 일이었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생각에 진저리를 치겠지만 피해자의 인권만큼이나 가해자의 인권 역시 소중히 생각하는 이런 문화권에서는 정호의 생각이 유달리 괴상한 것만은 아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