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생텍쥐페리

by 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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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왕자 ] 셍텍쥐페리




[어린 왕자]가 내 책장에 꽂혀있긴 하지만(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나는 이 책에 열광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은 내 비위를 상하게도 하는데, 이 세상을 채에 쳐서 하얗고 고운 부분만을 취하고 채에 남은 거친 것들은 (어쩌면 진짜는 여기에 다 있는데도) 얕보는 그 가증이 싫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순백의 천사가 아니듯이, 사랑이 여린 가시를 가진 아름다운 장미가 아니 듯이, 이 세상은 무고한 동화가 아니다. 그런데 바보인 척하면서 마치 이 세상에 순수함의 층위가 있어 걸러내고 보존할 수 있는 것처럼 뻔뻔하게 행세하는 것이다. 그 서정적이고 대중적인 거짓말.

그러나 이 거짓말은 얼마나 완벽한가.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간에 [어린 왕자]의 강렬한 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토록 선명하게 이미지화되는 이야기가 없으며 이토록 소중하게 간직하게 되는 이야기도 없다. 별들 사이를 홀로 여행하는 영원한 우주의 어린아이. 무신론자로 태어난 지금의 세대들에게 이 책은 성경 이상의 영향을 끼쳤다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신의 죽음을 선언했던 자가 죽은 바로 그 해에 태어난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의 작가라는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신은 죽고 믿음은 사라지고 세상은 허무하고 냉혹해지는데, 대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어린 왕자는 다시 태어난 예수 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수가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듯 어린 왕자 역시 비슷한 길을 걷는다. 다만 이번에는 가혹한 원죄도 영원한 구원도 없다. 그저 자기 자신 안의 순수함을 우리가 되찾길 요청할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코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순수함을 마치 아깝게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평생 찾아 헤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삶이 더 부드러워질 수만 있다면. 더 슬퍼질 수만 있다면. 신마저도 가차 없이 처형당하는 시대에 우리가 홀로 숨을 조그만 모래사막을 가질 수만 있다면.

하지만 만약 여우가 아니었다면 [어린 왕자]도 그저 재치 있는 정도의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어린 왕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유일하게 사람이 아닌 장미와 여우와 뱀만이 가장 현실적인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여우는 관계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관계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를 알려준다. [관계] 역시도 [순수함] 만큼이나 작위적이고 또한 인위적이지만, 고백하건대 우리에게는 그게 절실할 때가 있다. 출발지도 목적지도 없는 우리의 여행에도 가끔씩 정차할 정거장이 필요한 것이다.

[저길 봐.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내게 아무 소용도 없어. 그래서 밀밭은 내게 아무것도 생각나게 하지 않아. 그건 서글픈 일이지. 그런데 너는 금빛 머리칼을 가졌으니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근사할 거야. 밀은 금빛이니까 너를 생각나게 할 거야. 그럼 난 밀밭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게 되겠지.]

나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확하게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한 글을 본 적이 없다. 이 책이 혹여 아무리 두껍고 또 쓸데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 문장 하나 만으로도 나는 이 책을 책장 안에 소중하게 간직했을 것이다.

나는 어린아이가 어린아이인척 하는 교태를 싫어하듯, 순수함이 순수한 척하는 이 책의 교태를 싫어한다. 이 책의 첫 페이지에서의 '속이 보이는 보아 뱀'부터 마지막 페이지에서의 '편지를 보내주오' 운운까지, 낯간지러운 기교들이 내 흥을 사정없이 깨버린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와는 반대로 닳고 닳은 어른의 (혹은 닳고 닳은 작가의) 기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어린 왕자는 이야기 사이 행간 속에 온전히 보전되어 있다. 어느 먼 작은 별에서 장미 한 송이와 양 한 마리와 함께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 왕자, 여우는 노란 밀 밭 한가운데에 웅크리고 앉아 산들바람을 맞으며 콧노래를 부르고, 드넓은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쓸쓸한 우물가를 홀로 지키는 금빛 뱀 한 마리... 그래, 나는 인정한다.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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