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티즘

죠르쥬 바따이유 (조르주 바타유)​

by 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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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르쥬 바따이

유 (조르주 바타유)

[ 에로티즘 ] 죠르쥬 바따이유 (조르주 바타유)




나는 재미있게 읽은 책은 다 읽자마자 곧바로 한 번 더 읽는 습관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그 첫 번째 책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이 책을 읽고 상당히 흥분했었다. 최대한 멀리 거리를 둠으로써 최대한 깊이 들어가는 접근 방식, 객관적인 과학과 내면의 직관을 차별하지 않고 넘나드는 융통성, 자극적인 주제를 정신의 단계로 거침없이 고양시키는 금욕적인 추진력 등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에로티즘이란 그때 나에게는 일종의 신비 내지는 거역하기 힘든 섭리로 보였고 육체적 심리적 압박을 느끼면서도 그 압박의 근원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때 나는 학문적이기보다는 다소 (종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이었는데 막 종교를 벗어나던 시기에 이 책이 좋은 자극이 되어주었다.

사실 이 책의 저자가 글솜씨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 듯하다.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약간 산만하다고 할까, 중언부언한다고 할까, 도장을 쾅쾅 찍어줘야 하는 부분에서 얼버무리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사실 나는 책을 읽을 때 저자의 글솜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심지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때도 있는데) 그런 점에서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게다가 몇몇 언급된 예시에서는 (특히 사드에 대해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책이 이토록 흥미롭고 중대하고 심오하고 명쾌한데 말이다. 귀한 선물을 받았는데 포장 리본 따위를 두고 사사로운 트집을 잡는다는 건 어리석고 배은망덕한 짓이다.

내용을 기억나는 데로 정리해 보자면 (나는 실제 책 내용과 다르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감안해 주길 바란다.) 이것은 인간의 근원과 본질에 대한 탐구이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었을 때,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았을 때, 욕구와 욕망이 결합되지 않았을 때, 그때는 죽음도 에로티즘도 없었다. 단지 그것에 무지했다는 개념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죽음도 삶도 욕망도 자아도 없는, 오직 연속성과 무차별성의 거대한 출렁임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타부]가 이 세계의 경계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연속성과 무차별성, 즉 죽음이 물러난 그 경계에서부터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세상은 세상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의 의지라고 하기에는 (그때의 인간에게만큼이나 지금의 우리에게도) 너무나 심오하고 신비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절대적인 의지 자체인 [신]의 신성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 경계-타부를 보증하고 또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종교적인 경외심을 버리고 조금 평범한 말로 단순화해 보자면 [타부]는 [거리두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과의 거리두기, 욕구와의 거리두기, 자연과의 거리 두기, 상황과의 거리두기... 세계를 경계 짓는 타부는 세상의 축소라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확장인데 경계-타부, 즉 기준과 질서 없이는 측정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며 우리는 그것을 중심으로 자유와 의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계를 확보한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더 넓히기 위해, 그 세계를 채우기 위해, 그리고 지배하기 위해 노동을 시작한다. (아마도 이것은 순차의 문제가 아니라 유기적인 작용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노동과 질서, 분열과 자아에 몰두하고 그것을 만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의 근원인 연속성과 무차별성에 대해 강렬한 유혹을 느끼며 심지어 그것을 위해 타부를 위반하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는다. 왜일까? 그 세계가 너무나 매혹적이기 때문일까? 너무나 매혹적이기에 금지되어 있는 것일까? 아니다. 반대로 금지되어 있기에 그것이 매혹적인 것이다. 금지되어 있기에 우리는 욕망하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욕망하라고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금지함으로써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금기가 동시에 금지를 어기도록 부추김으로서 바로 그 인간성을 위협한다는 건 언뜻 부조리해 보인다. 금지한 거라면 왜 금지를 위반하도록 하며, 금지를 위반할 거라면 왜 금지하는가. 그러나 금기-경계가 양쪽 세계에 대한 절단면이 아니라 접촉면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좀 더 쉬워진다. 즉 우리는 경계를 넘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접촉하려고 하는 것이다. 위반이 아닌 접촉으로써 양쪽 세계를 통합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욕망의 형이상학적이고 근본적인 실체이다. (물론 대부분의 욕망은 그 단계까지 다다르지 못한다. 우리는 종종 목적을 위한 수단에서 만족하여 멈추거나 그곳에서 길을 잃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야 말로 실은 그 접촉면 자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타부'란 '인간'의 현상적 표현 혹은 외적 투시에 다름 아니다. 금기의 위반, 즉 접촉면에 접촉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내적인 완전성의 추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로티즘 즉 금기를 위반하고자 하는 욕망은 금기와 대면하고 대립하며 그것을 극복하고 통합하여 승화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힘이다. 인간은  연속성-무차별성과 접촉함으로써 잠시 자기 자신을 잊고, 이 세상을 잊고, 모든 노동과 속세를 잊는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화해함으로써 자기 자신과의 합일을 맛본다. 그 폭발하는 내적 체험을 통해서 개인은 삶과 생명에 대한 충만함을 얻고 노동의 세계의 합리적이고 구조적인 힘과 균형을 맞출 수 있다. 끊임없이 나선형으로 고양되는 이 균형의 순환 구조야 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타부를 미신적인 것, 고리타분한 것, 자유와 상상력과 쾌락을 제한하는 장애물로 몰아붙여 척결의 대상으로 만든 건 아닐까? 물론 오늘날에도 타부는 존재한다. (타부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우리는 타부 앞에서 여전히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제는 타부에 대한 두려움과 부끄러움보다 '타부에 대한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대한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더 크게 느끼는 듯하다. 우리는 금기를 극복하기보다는 무시하려고 한다. (혹은 무시하는 것을 극복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신도, 신성도, 종교도 수호하지 않는 타부는 그저 무지와 나약함의 상징일 뿐이다. 우리는 지옥을 버리면서 천국도 버리고, 타락하지 않음으로써 구원되지도 않고, 인간 이하를 벗어남으로써 인간 이상도 될 수 없게 되었다. 그저 겸손하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하지 않을 뿐이다. 모든 게 그럭저럭 적당히 납득되는 평평한 세상. 진정한 에로티즘이 없는 세상, 자기 자신에게 기대하지도 실망하지도 않는 안전한 세상.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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