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통의 죽음

게오르크 뷔히너

by 곡도




[당통의 죽음] 게오르크 뷔히너





이 책에는 [보이체크]와 [당통의 죽음] 두 작품이 실려 있다. 먼저 읽은 [보이체크]가 별로 재미없었기 때문에 나는 [당통의 죽음]에 대해서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더구나 [당통의 죽음]에 나오는 수많은 등장인물들과 비유들은 프랑스혁명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 솔직히 말해서 주석에서 일일이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괴로웠을 것이다. -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희곡을 문학의 한 형식이라고 생각할 뿐 연극을 위한 대본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과연 이것이 연극으로 제대로 구현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몇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나는 이 희곡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 화려하고 담대한 말의 향연.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프랑스혁명에 대해 평가 절하하는 의견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민중에 의한, 자유를 위한, 시대를 앞서가는 혁명이 아니라 선동과 조작에 의한 사기극, 부르주아의 이익과 해방을 위한 계급 숙청, 피가 피를 부르는 광기의 퍼레이드 등등... 그래, 이것은 모두 옳은 말이다. 프랑스혁명의 순수성은 기요틴 앞에서 머리가 잘려나갔는지도 모른다. 혁명의 이름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함부로 죽어나갔다. 시대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혁명은 살인이라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입을, 그러니까 그들의 [말]을 막기 위해서는 말이다. 바야흐로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프랑스혁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인물들 면면의 흥망성쇠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말'이었다. 정치의 시대, 연설의 시대, 말의 시대가 열리면서 온갖 논리와 의견과 사상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것이 지성의 대결이 아닌 서로를 죽고 죽이는 속된 경쟁으로 치닫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설득하고 민중의 선택을 요구하는 민주주의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말할 게 있는 자는 말하게 하라. 그럼 우리가 들을 것이다. (설사 그다음에는 죽일지라도.)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희곡의 본질이 아닌가.

만약 프랑스혁명이라는, 누구나 이미 다 알고 있는 죽음과 음모와 선동과 혁명의 드라마(말 그대로 '극적'인)가 아니었다면 [당통의 죽음]의 대사들은 다소 과장되고 지나치게 흥분 상태인 문학적 수사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이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역사가 이 희곡에 심장처럼 뜨거운 피를 공급해 주었다. 이 희곡의 줄거리라는 건 실상 별게 없다. 두 세력의 대결에서 한쪽이 지고 처형당하는 것뿐이다. 딱히 반전도 없고 클라이맥스도 없다. 가장 극적이고 자극적이었을 처형 장면은 정작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에, 대사들 사이의 행간마다, 죽음보다 더 뜨거운 삶과 꿈과 감정들이 뒤섞여 끓어오르고 있다는 걸 안다. 그에 비하면 정작 죽음 자체는 시시한 것이다.

이 희곡을 읽는 즐거움은 크게 두 가지인데 '연설'과 '사색'이다. 첫째로, 우리는 양 세력이 펼치는, 사실상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으로 집약되는 '말의 대결'을 본다. 사실상 둘 다 똑같이 옳다. 말은 언제나 옳으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누구의 말이 더 사람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느냐일 것이다. 끓어오른 피는 언제나 말을 이긴다. 그런데 당통은 사람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식혀야만 했다. 그것은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당통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사실상 민중을 너무 우습게 봤다. 민중은 정의와 복수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 (그리고 어쩌면 그건 옳은 일이다.) 당통은 복수가 (혹은 민중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느새 자신도 기득권이 되었다는 사실을, 민중의 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둘째는, 우리는 죽음을 앞둔 지식인들의 멋진 사색을 본다. 그들은 죽음을 앞두고 발광하지 않는다. 그들은 눈물을 쏟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는다. 그러나 역시나 (지식인답게) 침묵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말, 말을 한다. 죽는 그 순간 마지막까지 계속. 그들은 말하고 토론하고 농담하며 어록을 남긴다. 그들은 세련되게 죽고 싶어 한다. 비록 그들의 머리가 잘려나가는 순간은 밖으로 길게 튀어나온 그들의 혀와 함께 별로 세련되지 않겠지만, 희곡은 그 부분을 감춤으로써 그들을 보호해 준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세련되게 죽을 수 있다. 그 아내들의 순정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바쳐지는 헌사이다.

'연설'과 '사색'의 말, 산 자와 죽은 자만큼이나 극명한 그 온도차가 이 희곡의 핵심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면서 우리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다. 그것이 프랑스혁명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 혹은 공적인 죽음과 사적인 죽음이 한꺼번에 뒤섞이는 혁명이라는 거대한 괴물. 이 희곡은 그것을 날카로운 칼로 베어내어 핏물을 잘 빼낸 후에 화려한 접시에 담아 내놓았다. 우리는 마치 자신이 미식가라도 된 것처럼 그것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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