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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Nov 03. 2022

직시와 외면이 만나는 경계


[극장의 관객] by Hippolyte Michaud




     나는 사실 이 글을 쓸 계획이 없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보았을 연극]을 쓰기 위해 인터파크 티켓을 훑어보던 중이었다. 그런데 보고 싶은 연극이 하나도 없었다. 단 하나도. 코로나 확진자가 다시 늘어나서 인지, 아니면 한 번 주저앉은 연극판이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한 것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무언가 쓰기로 마음먹었으니 무언가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해 글을 쓰는 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안그래도 세상에는 억울한 죽음이 많고, 아니, 어쩌면 세상에는 억울하지 않은 죽음이 하나도 없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죽음도 많은데, 모든 사람들이 애도하는 일에 나까지 한몫 거들 필요가 있을까 싶다. 물론 나에게도 이런저런 의견과 판단이 있지만 뻔한 수준일 뿐이고 딱히 대세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어서 글로 옮길 가치는 없어 보인다. 설사 막상 글로 쓴다고 해도 도대체 얼마만큼 진지해야 하는 건지, 얼마만큼 몰입해야 하는 건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짐작이 잘 가지 않는다. 기껏 자기 검열과 기만으로 혐오감만 -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의 혐오감도 - 가증시킬 것 같다. 결국 이 글은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한 글은 아니다. 그저 개인적인 단상일 뿐이다. 

     나는 보통 이런 일에 크게 동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 역시 마냥 냉소적일 수만은 없었다. 그건 무엇보다 이번 참사를 찍은 영상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죽어가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 찍힌 영상을 처음 본 건 아니지만, 이번 같은 장면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나는 지금 자기 검열을 하지 않기 위해, 솔직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끔찍했다. 그것은 끔찍하게 생생했고 생생하게 끔찍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이했다. '안녕'이라는 허구에 대한 충격적인 직시. 나는 그 영상을 보고 또 보았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흥미 때문이었다고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다. 솔직히 그게 흥미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어쨌든 나는 보고 싶었다. 그런데 보면서도 잘 보이지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보려고 했던 것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는 오히려 외면하고 싶어서 그것을 봤는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자기 감상에 빠져 문학적인 미사여구를 남발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나 자신이 짐짓 진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 자신을 방어해서도 안된다. 나는 그저 구경꾼이었을 뿐이다. 나는 그 영상들을 수십 번씩 보고도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악몽 한 번 꾸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냉담함에 다시 한번 놀랐다.  

    이런 참사와 비견할 수는 없지만, 나도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정말이지 아무 일도 일어날 게 없는 일상적인 상황에서 별안간 그런 일이 - 그냥 - 벌어졌다. 순식간에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더니 정상의 시공간에서 떨어져 나와 연고도 좌표도 없는 허공에 던져진 것 같았는데, 그건 내 정신이 혼미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었다. 생사가  더 이상 내 소관이 아니며, 그것에 집중할 수조차 없는,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에서, 나 자신이 마치 뿌옇게 흩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다. 나는 멋들어지게 말하려고 너무 애쓰고 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쥐어짜내고 있는 탓이다. 이렇게 길게 늘어놓을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냥 정신이 나갔던 것뿐이다. 그런데도 그 당시의 모든 게 똑똑하게 기억난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그때 일을 계속 반복해서 머릿속으로 돌려보았다. 단지 그 사건 당시뿐만 아니라 그 사건이 일어난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부터 시작해서 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모든 과정을 다시 반복했다. 내가 그날  했던 100가지의 선택 중에 한 가지만 다르게 선택했어도 나는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죽음을 피해 도망간 멀고 먼 곳에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가 "네가 오지 않을까봐 걱정했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평소 좋아하고 또 두려워했는데, 그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실감한 셈이었다. 내가 죽게 되는 그 순간, 내가 죽을 그 자리로 나 스스로 차곡차곡 걸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언젠가 내가 죽기 직전 다시 그 사건이 있었던 때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거나, 어쩌면 나는 그때 이미 죽었고 지금의 삶은 꿈일지도 모른다는 - 분명 공포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을 - 상상도 해보게 된다. 이제 나는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고 있지만 지금도 머리 한쪽에서는 여전히 그날 하루가 끊임없이 반복해서 돌아가고 있다. 그러다가 그 사고가 나는 순간에 다다르면 멀쩡히 있다가도 별안간 소스라친다. 그렇지만 그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경련에 불과하다. 눈을 한 번 꽉 감았다 뜰뿐이다. 어쨌거나 나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 악몽 한 번 꾸지 않는다. 참 스스로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써놓고 보니 무슨 대단한 사고라도 당한 것처럼 오해를 유발할 것 같아 바로잡아야겠다. 결과적으로 별 일 아니었다. 더구나 이런 참사에 갖다 붙일 정도는 더더욱이나 안된다. 그저 무슨 일이 벌어지든 불가능하지 않았던 그런 지점 가까이에 갔다고 느꼈던 나 자신의 지극히 주관적인 체험일 뿐이다. 객소리가 길었지만 이제 이 글을 연극 관련 칼럼에 올린 이유를 설명해야겠다. 사실 내가 얘기하려던 건 참사에 대해서가 아니라 연극에 대해서였다. 

      참사의 영상을 반복해서 보면서, 그 현실을 직시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나는 불현듯 연극이 보고 싶어졌다. 이유는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연극보다 먼저 떠올린 이미지는 벙커였는지도 모르겠다. (보통 지하에 위치한 소극장들이 내게 벙커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고 싶었을까. 생명과 죽음으로 환원되는 철저한 현실을, 혹은 진실을, 외면하고 싶었을까. 어둠 속 관객석에 편안하게 앉아서 아무 죄의식도 두려움도 없이, 살 염려도 죽을 염려도 없이, 마음 놓고 무대를 방관하고 싶었을까. 아무 말도 못 하고 죽어간 모든 자들을 무대 위로 불러 모아 말하게 하고 싶었을까. 그리고 아무 할 말이 없는 나 자신에게 계속 침묵을 강요하고 싶었을까.  

     연극은 직시하고 싶으면서도 외면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기원으로 한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직시하게 하고 동시에 외면하게 함으로써, 이 모순을 용인함으로써, 우리를 준비시킨다. 우리가 더 이상 직시할 수 없고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순간을, 우리 각자가 반드시 대면하게 될 그 고독한 순간을 말이다. 놀라지 마라. 슬퍼하지 마라.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그러나 연극은 실패한다. 반드시 실패하기 때문에, 실패할 걸 알기에, 실패하기 위해, 우리는 연극을 보러 간다. 

     그러나 최소한 연극이 공연되는 동안에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 죽었던 배우들도 다시 일어나 웃으며 인사한다. 죽음마저도 우리와 함께 관객석에 앉아 연극을 구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극이 끝나면 커튼콜에서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나오는 것은 언제나 죽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는 이 글의 제목을 [직시와 외면이 만나는 경계]라고 정했다. 그러나 그냥 그럴듯하게 갖다 붙인 것일 뿐 심사숙고한 건 아니었다. '경계'라는 말은 뭔가 있어 보이지만 어디에나 쓸 수 있는 관용어로 정교한 표현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 '경계'라는 것이 무대를 말하는 것인지 관객석을 말하는 것인지 그 모두를 아우르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경계'라는 단어 대신에 다른 말을 넣어보려 했지만 별안간 너무나 귀찮기만 하다. 그러니 불성실한 제목에 대해서는 양해만 구하고 넘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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