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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Mar 05. 2023

[연극] 컬렉티드 스토리즈





연극 : 컬렉티드 스토리즈

공연장소 : 소극장 산울림

공연기간 : 2023년 3월 2일 ~ 2023년 3월 26일

관람시간 : 2023년 3월 4일 오후 3시




    2020년 11월 8일 [신의 아그네스]를 마지막으로 2년이 넘도록 연극을 보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이었다. 그 당시 최소한 격주로, 심지어 탄력을 받으면 매주 한 편씩 연극을 보기도 했지만 전염병 공포증과 건강상의 위협에 맞서면서까지 연극을 볼 만큼 애호가는 아니었다. 만약 몇 달 전에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연극을 보러 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코로나도 이미 걸렸겠다, 사회적인 분위기도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졌겠다, 나는 3편의 연극을 예매했고 오늘 그 첫 번째 편인 [컬렉티드 스토리즈]를 보았다. 2년 만에 연극을 본 소감을 말하자면, 오랜만에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 틈에 끼어 코로나의 공포와 싸우며  2시간 넘게 앉아 있다 보니 편두통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와서 감회고 뭐고 느낄 새가 없었다. 그렇지만 오랜만인데도 불구하고 특별히 낯설지는 않았는데, 연극을 아무리 많이 보아도 매번 늘 낯설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연극을 보았을 때처럼  '내가 여기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에 주눅이 들어 마치 들키면 안 되는 사람처럼 사람들 그림자 속에 숨어야만 한다.

   먼저 무대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잠시 뜸을 들여 볼까. 원래 이 극장의 무대 모양 자체가 원형인데다가 무대의 최전방 앞쪽까지 탁자 같은 가구를 배치함으로써 이 무대는 폐쇄성을 공공연히 자인한다. 이 무대는 내부로 닫혀 있으며 관객은 엿보는 사람 이상은 아니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못 박은 셈이다.  무대 뒤쪽은 책이 오브제가 된 그림들과 오직 텅 빈 틀만이 남음으로써 스스로 무대의 오브제가 된 액자들로 다소 추상적으로 꾸며져 있다. 사실 이건 좀 난감하다. 나는 이 무대 장식이  신선한 건지 촌스러운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고루한 건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과감했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불필요한 과감한 자체가 신선함이기도 하지만 의미 없는 멋부림은 번거롭지. 아, 이건 호감을 느끼기에도 비호감을 느끼기에도 좀 애매해. 그럼 나는 아무것도 언어화시킬 수가 없다. 두통이 시작된 건 여기서부터였을까?

   자, 이제 연극에 대한 얘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데 나는 좀 망설여진다. 나는 이 연극을 설명하기 위해 논란이 될 만한 단어를 하나 끌어와야 한다. 일부러 자극적이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 단어를 대체할 단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단어가 무언가를 선명하고 명확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온갖 잡탕의 미신들과 분노와 이론들을 끌어모아 모든 걸 침침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쨌거나 나에게는 글을 쓰기 위한 단어가 필요하다. 일단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연극은 '여성적'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여기서 이 글을 끝내 버린다면 읽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예 이 단어의 뜻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여성적'이라는 단어만큼 텅 비어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 '여성적'이라는 단어야 말로 여성문제에의 현주소인지도 모른다.

    거의 모든 예술이 보통 그렇듯 연극 역시 남성적이다. 연출가나 주인공, 작가가 보통 남자라는 물리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성정체성이 남성적이라고 해야 할까. 최근에 많은 노력들이 있지만 여전히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하다고 생각한다. 연극이 '남성적'인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연극을 딱히 남성적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연극이 여성적일 때, 그것은 지적할 만한 뉴스거리가 된다. 마치 '배우'와 '여배우'의 차이처럼 '연극'과 '여성적인 연극'이 있다.

     '남성적'이라는 단어는 보통 긍정적인 의미나 칭찬의 의미로 쓰인다. 그리고 이 표현을 부정적으로 쓰고 싶을 때 사람들은 '남성적' 대신에 '마초적'이라는 단어를 쓴다. 이 단어는 오래전에는 '남자'라는 본연의 뜻으로 유통되었고 오늘날 농담이나 애칭 정도로 쓰이기도 하지만 결국 페미니즘의 색채에 물들어 부정적인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오늘날 '마초'라는 단어는 남성 권력이나 남성 문화를 작위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우리는 '남성적'이라는 말을 긍정의 '남성적'과 부정의 '마초적'으로 공정하게 구분해서 쓸 수 있다. 이것은 담론을 구성할 때 상당히 선명하고 또한 편리하다.

    그런데 '여성적'이란 단어는 어떤가. 나는 '여성적'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  담론의 영역에서 떳떳이 사용할 수 있는 -  단어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긍정적일 때나 부정적일 때 모두 그저 '여성적'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것이 약자에 대한 기사도적인 배려 때문인지, 아니면 '여성적'이라는 단어가 이미 충분히 부정적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어쨌건 결과적으로 '여성적'이라는 단어는  복잡한 뉘앙스와 용도를 그때그때 눈치껏 적용해야 하는 혼탁하고 곤란한 표현이 되었다.

   그래서 '이 연극은 여성적이다'라고 말했을 때, 아무도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뉘앙스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연극에 대한 나의 감상은 이 단어에 뉘앙스를 입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우선 내가 이 연극을 여성적이라고 느낀 건 이 연극의 주인공들을 결코 남자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주인공들의 이름이나, 캐릭터 설정이나, 남자와의 연애담 같은 에피소드 때문이 아니다. '햄릿'도 여배우가 맡는 세상에서 그 정도는 일도 아니다. 그보다 두 주인공, 루스와 리사의 감정 교류의 방식과 갈등이 전개되는 구조 자체가 너무나 여성적이기 때문이다. 들여다 보면 이 연극은 재미있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예술, 모방, 복제, 예술가의 윤리 문제 등등이 식빵 속의 건포도처럼 알알히 박혀 있다. 그러나 그 모든 흥미로운 요소들은 말 그대로 약간의 달콤함을 가미하기 위한 것일 뿐, '관계'라는 거대한 밀가루 덩어리에 매몰되어 버린다. 중요한 것은 예술도 윤리도 아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문제는 관계와 관계가 만들어내는 감정이다. 사소하고 미세하지만 언제나 우리의 인생을 뒤흔들고 나 자신을 규정하게 하는 관계, 그리고 감정. (사실 '관계'와 '감정'은 이음동의어가 아닌가.) 이것에 대한, 아니, 오직 이것만에 대한 관심과 헌신이 나에게 이 연극이 '여성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거기가 이 연극 속에서 관계는 철저하게 '어머니와 딸'로 점철되어 있다. 절대로 '아버지와 아들' 혹은 '아버지와 딸' 혹은 '어머니와 아들'로 대체될 수 없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심리적 교감이 핵심이다. 그리하여 이 연극에서는 여성 호르몬이 넘쳐흐르고 여성적 촉감과 색깔의 우정과 갈등, 히스테리가 섬세하게 펼쳐진다. 사실 이 연극은 일종의 멜로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예술이니 소설이니 하는 것들은 통째로 들어내도 아무 상관이 없다. 멜로드라마에서 남주가 재벌3세든, 의사이든, 카페 사장이든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문제는 사랑이다.

     여성들은 이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할지도 모른다. 공감하고 감동받고 성찰할지도 모른다. 물론 남성들도 이해할 수 있다. 공감하고 감동받고 성찰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 지긋지긋하기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연극 전체에는 -  평소 일상생활에서도 남자들이 여자들로부터 늘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하는 -  "내 고민을 분석하고 해결해 달라는 게 아니야. 내 고민에 공감해 달라는 거야"라는 타당하지만 동시에 부당하기 그지없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큰 소리로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요구는 남자들을 혹은 '남성적'인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고 쩔쩔매게 한다. 그것은 너무 뻔하고 또 닳고 닳아서 굳이 대화의 주제로 삼을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무대 위해서랴. 그건 과연 이 사람들이 지극히 '마초적'이기 때문일까?   

    내가 나의 '여성적'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를 제대로 설명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서두에 무대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미 모든 것을 말했다. 연극 전체가 나에게는 좀 진부하게 여겨졌으면 정작 중요하고 흥미로운 문제는 전혀 중요하고 흥미롭게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섬세하고 미세하지만 진부한 감정 표현의 범람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잘못을 희곡 탓으로 돌리는 게 정당하고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이 희곡을 선택한 건 이 연극이니까 변명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희곡의 결함이나 결핍을 연출이나 연기로 충분히 보상할 수 있고 때로는 희곡을 훨씬 뛰어넘을 수 있는 게 연극인데, 그 점에서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마지막 갈등의 최고점에서 연기자들의 에너지가 부족하고 또 산만했으며 장면을 압도하지 못한다고 느꼈는데, 다시 말하지만 그건 희곡의 자체의 문제가 제일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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