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지구의 [왕자와 거지]

by 곡도


SE-5dd5541a-c362-4475-bd30-6d6b60b75a78.jpg [ The Prince and the Pauper ] 일러스트




늦은 저녁, 대통령 관저 지하에 위치한 비밀 벙커에 서른 명 남짓한 정부 관료들이 모였다. 원탁 주위로 앉은 그들의 침통한 얼굴과 그들 사이에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이 이번 사안의 심각성을 짐작케 했다. 이윽고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우리의 위대한 선조이신 '세 명의 아이'는 멸망한 구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이었지요. 완전한 폐허 속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교육하고 규제할 어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정의나 도덕의 설계도는 고사하고 그 화석조차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격이란 더 이상 복사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걸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고 새하얀 백지 위에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영원히 아이들을 찬양하라. 그리하여 그들은 멸망한 구세계의 그 모든 악습과 범죄와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세계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우리 세계의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는 건 모순적이지만 엄중한 현실이지요. 오늘 우리는 그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대책을 논의하고자 이곳에 모였습니다.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요. 아니, 이미 너무 늦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모두들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국무총리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일이 급격히 진행된 건 사실입니다. 절망적인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죠. 우리는 말 그대로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세 명의 아이'가 보여주신 그 경이로운 행보를 기억하며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남자아이 둘에 여자 아이 하나에서 이 위대한 문명이 건설되었다는 것을........"


그때 국회의장이 불쾌함을 감추지 않으며 끼어들었다.


"총리님, 이 자리에서 그런 정쟁적인 발언은 삼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남자아이 둘에 여자 아이 하나라는 건 전혀 밝혀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오히려 '세 명의 아이'학의 권위자들에 따르면 현재 인구의 증가 통계로 계산할 때 여자 아이 둘에 남자아이 하나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지금 좌파와 우파가 이념 싸움을 할 때가 아닙니다."


대통령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단지 '세 명의 아이'가 모두 남자 아이였거나 모두 여자 아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들에게 성별이란 본질이 아니라 기능에 불과했지요. 종족 보존이라는 실질적인 소용 외에는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었어요. 그들에게 성별의 차이는 개성의 차이보다도 미미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성별과 상관없이 개인 대 개인으로서 서로 평등하게 사랑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정의의 원형이 되었으며 우리 정신세계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엄청난 축복입니다. 엄청난 행운이에요. 영원히 아이들을 찬양하라."


"영원히 아이들을 찬양하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외쳤다.


"그것이 도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특히 과학적으로 옳다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죠. 그것에 관한 이론적 정립은 이미 1200년 전에 끝났으니까요. 이제 '동성애'와 '이성애'라는 단어조차 실생활에서는 쓰이지 않는 고리타분한 학술 전문 용어가 되었습니다."


인권위원장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만약 이성애와 동성애의 비율이 균형을 유지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 동성애가 성적 관계의 주류가 되었다는 건 재앙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보건복지부 장관이 말을 이었다.


"90% 이상이 동성애자가 되었으니까요. 출산율이 수직으로 곤두박질치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 심지어 이성애자들 중에도 아이를 갖지 않는 커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예 영구 불임수술을 받는 이성애자들도 적지 않아요. 자기애와 자기 확신, 사랑 지상주의, 파트너에 대한 충성도가 너무 강해진 나머지 사람들은 종족 보존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의 문명이 멸망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모두들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성애자가 몇 명이나 있죠?"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속기록을 작성하고 있던 서기가 수줍게 손을 들었다가 얼른 내렸다. 대통령은 얼음물 한 컵을 단번에 들이켜고는 물었다.


"자녀가 있는 사람은요?"


이번에는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대통령의 미간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만성 위장병을 앓고 있는 그의 위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조용히 신음 소리를 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생존을 위해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신념과 윤리를 배신해야만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원래 정치인이 하는 일이죠. 정치인은 개인적이고 정직하며 소시민적인 정의를 위반하라고 뽑힌 자들이니까요.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면서 전쟁을 주도하고, 도박하지 말라고 하면서 불분명한 정책을 감행하고, 투기하지 말라고 하면서 사업가들과 협작 하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거짓을 선전 선동하고, 뇌물을 주지 말라고 하면서 뇌물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일들로 우리를 비난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그러한 우리의 특기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모두들 침통한 표정이었다. 행정안전부 장관이 용기를 내어 발언했다.


"하지만 이미 모든 방법을 다 써보지 않았습니까. 결혼비와 출산비, 양육비, 교육비까지 모두 국가에서 다 지원하고 있고, '이성애자 데이트 앱'을 대통령 직속 기관에서 운영하고 있죠. 이성애를 홍보하고, 이성애 차별법을 제정하고, 이성애자들에게는 세금까지 감면해주고 있어요."


교육부 장관도 거들었다.


"아이들이 천사라도 되는 양 이미지를 포장하고, 출산과 육아에 대한 장점을 과장하고, 종족 보존이라는 애국주의 신념을 자극하고, 이성애 가족에 대한 판타지를 유포했죠. 그렇지만 조금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점점 더 동성애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생각에 기울어지고 있어요. 막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들 다시 침묵에 빠졌다. 이제까지의 침묵보다 더 깊은 침묵이었다. 국방부 장관은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그때 고용노동부 장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The Prince and the Pauper3.jpg [ The Prince and the Pauper ] 책 표지




"우리에게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모두들 고개를 들고, 그러나 별 기대감 없는 눈빛으로 고용노동부 장관을 바라보았다. 고용노동부 장관은 말을 이었다.


"철저하게 금지시켜야만 합니다."


"동성애를 말이오?"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라서 외쳤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들부터가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농림식품부 장관과 해양수산부 장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연인관계였던 것이다.


"동성애 얘기가 아닙니다."


고용노동부 장관이 말했다.


"이성애를 금지시키자는 겁니다."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당장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외쳤다.


"제정신이오? 권장해도 먹히지 않는 판에 금지시키라니? 그냥 앉아서 죽자는 말이 아닙니까?"


고용노동부 장관은 침착하게 말했다.


"권장해도 먹히지 않으니 금지시키자는 겁니다. 사랑을 차별하고, 사랑을 탄압하며, 사랑을 쟁취해야 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죠. 사랑을 고통과 고뇌와 승리로 물들이는 거예요. 이성애를 낭만주의로, 이성애자들을 순교자로, 결혼을 투쟁으로 바꾸는 겁니다. 그럼 아이들은 숭고한 사랑의 증거이자 증인이 될 게 아닙니까? 아이들은 성스러워질 겁니다. 이성애자들은 신을 영접하듯 자신의 아이들을 모시고 섬길 거예요. 그럼 그 아이들은 장차 이성애를 위한 투사가 되어 동성애를 향해 전쟁을 선포하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 이성애자들이 승리할 가능성은 적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 명맥은 유지할 수 있겠죠."


모두의 얼굴에 당혹과 희망이 번갈아 스쳐 지나갔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까지 나온 아이디어 중 가장 그럴듯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금지시키지요?"


국토교통부 장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데 꼭 결정적인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죠."


국방부 장관이 말했다.


"출산과 성관계의 동물적 연관성을 강조하면 어떨까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말했다.


"그럴듯하군요. 짐승처럼 번식으로 이어지는 성관계는 반문명적이고 반인격적이라고 규정 하는 거죠."


외교부 장관이 말했다.


"이성애는 우리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아름다운 성도덕을 타락시키는 비정상적인 변태 행위라고 말입니다."


중소기업 벤처부 장관이 말했다.


"그래요. 이성애는 용서받지 못할 범죄 행위인 것입니다."


법무부 장관이 힘주어 외쳤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사심이 섞여 있었는데, 그는 동성애 극단주의자로 이성애를 혐오했던 것이다.


"그럼 의견이 모인 것 같군요."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관료들을 둘러보며 비장하게 선언했다.


"이로서 이성애가 불법이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대통령은 세 개의 손가락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관료들 역시 모두 찬성의 표시로 세 개의 손가락을 높이 들어 올렸다. 대통령은 비장하지만 흔들림 없이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훗날 역사는 우리를 비난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연애 차별주의자'라는 더러운 오명을 붙이며 두고두고 우리를 모욕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명이 존속하는 한 영원한 배덕자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견뎌내야 합니다. 자신의 사사로운 사랑과 믿음과 소신을 위해서라면 인류의 존속 따위는 쓰레기통으로 걷어차버릴 어리석의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말입니다. 정치인이란 그런 것, 정의와 자유와 법치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일 먼저 할 일은......"


대통령이 국가안보실장에게 무언가를 속삭이자 국가안보실장이 벙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을 호출했다. 벙커에 들어온 경호원들은 갑자기 서기에게 달려들더니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그의 노트북까지 압수했다.


"흔적을 깨끗이 없애야죠."


국가 안보실장이 끌려나가는 서기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서기는 무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입에 물린 재갈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얘기를 들었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똑같이 냉담했을 것이다. 이것은 고작 한 사람의 목숨이 아닌 전 인류의 존망이 걸린 일이니까. 그들은 대의와 소의를 구분하는 데는 타고난 전문가들이었다.


"자, 일이 잘 마무리된 것 같군요.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합시다."


대통령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의 위장도 잠잠해졌다.


"영원히 아이들을 찬양하라."


국무총리가 외쳤다.


"영원히 아이들을 찬양하라."


모두가 소리 높여 외쳤다.





매거진의 이전글다른 지구의 [사람이 된 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