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윤두서

by 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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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 윤두서 (17세기 후반)





풍경으로서가 아니라


장면으로서가 아니라


역할로서가 아니라


심지어 역사로서도


실존으로서도 아닌


자신의 얼굴 하나로


이 세계를 가득 채운다.


그는 거의 인격을 버리려고 한다.


그는 거의 이름을 버리려고 한다.


그는 거의 신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수염이,


그가 가느다란 붓으로 한올한올


공들여 그려 넣은 수염이


그의 목을 칭칭 감아


이 물질의 세계에 단단히 묶어 놓는다.


마치 바람이 이는 물결에 칭칭 묶인


달의 그림자처럼.


한올한올의 미로 속을 헤매는


수백가닥의 시선들 속에서


그는 소원대로 불멸이 되었나.


누구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질문도 아니고 답도 아닌


침묵의 고함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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