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이 애도 동현이를 좋아하는 건가?’
그러자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가 그것을 감추기 위해 나는 황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하마터면 입 사이에서 푸시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말이다. 만약 사정을 아는 누군가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면 분명 내가 속이 비비 꼬인 나머지 화를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정말 기껍고 사심 없이 웃었을 뿐이었다.
일단 최대한 공정하게 마음을 다잡아도 소영이의 외모가 결코 나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애의 피부는 제법 하얗고 매끄러운 편이었지만 짙은 갈색 주근깨로 뒤덮여 있어서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기는 힘들었다. (실제로 소영이는 ‘깨강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남학생들 앞에만 서면 쩔쩔매며 더듬거리기까지 하는 그녀의 태도는 누가 보아도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내가 웃은 것은 맹세코 그런 유치한 우월감이나 경쟁심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가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소영이가 동현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마치 먼 타국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났을 때와 같은 진솔하고도 익살스러운 기쁨을 나에게 느끼게 해주었다. 순간 따듯하고 기민한 정이 넘쳐서 아무런 스스럼없이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고백할 생각이야?”
소영이가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고백 안 할 거야.”
나는 재빨리 대답했는데, 서두른 탓에 그만 명랑한 어투가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따듯한 동지애가 이미 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빨리 이 애를 안심시키고 나를 믿게끔 만들고 싶었다.
“그래?”
소영이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딱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야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응, 그렇다니까. 계속 혼자서만 좋아할 거야.”
다시 한 번 더 힘주어 말하는 내 말투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친절하고 부드러웠다. 혹시 소영이가 겁을 먹고 다른 말로 둘러대지 않을까 하는 것만이 그 순간 나의 유일한 염려였다. 그 애가 소매 끝 부분에 달린 검은색 교복 단추를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는 동안에도 나는 재촉하지 않고 끈기 있게 기다렸다.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을 마음에 담았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물색 모르고 수심에 잠겨 있는 소영이가 안쓰럽고도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소영이가 숨겨왔던 마음을 고백해오면 (이 애가 울음이라도 터트린다면 더욱 효과적일 텐데) 자상하고 어른스럽게 위로하리라고, 그리고 소영이에게서 더 큰 위로를 받으리라고 나는 벼르고 있었다.
마침내 소영이는 얘기할 결심이 섰는지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최대한 눈꼬리를 내리고 입가에는 미소를 띤 채 근심이 가득한 소영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를 치켜보는 소영이의 비굴한 표정 뒤에서 날카로운 거만함이 재빨리 스쳐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얼핏 느꼈을 때는 이미 소영이가 입을 열고 있는 중이었다.
“저, 사실은, 저기, 내가 말이야, 그만 말해버렸어.”
“뭐?”
“아니, 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어떻게 하다 보니까…….”
“뭘 말했다는 거야?”
나는 어눌한 말투로 반문하다가 고쳐 물었다.
“누구한테?”
“그게, 동현이하고 얘기하다가.”
“동현이?”
소영이가 혀로 마른 입가를 슬쩍 핥았다.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징그럽게 느껴졌다.
“동현이한테 뭐라고 했는데?”
“저기, 그게, 네가 동현이를 좋아한다는 거 말이야.”
나는 순간 넋이 빠져서 소영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시에 뺨이라도 갈겨 맞은 듯 온 몸이 얼얼했다. 피가 한꺼번에 얼굴로 솟구쳐 올라 나도 모르게 헐떡거릴까 봐 겁이 날 지경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없자 소영이는 느릿느릿 얘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그냥, 동현이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어쩌면 동현이도 너한테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너는 물어보는 걸 겁내기만 하고, 그래서 나라도 나서야 될 것 같았어. 정말 나는 너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거야.”
얼핏 듣기에 소영이는 내가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투였지만 부자연스럽게 늘어뜨리는 말끝이 너무나 뻔뻔하기만 했다. 심지어 발밑의 개미들을 쫒아 움직이는 눈동자도 어딘지 생기 있어 보였다.
“나는 정말 네가 안쓰러워서, 그래서 나라도 나서야 된다고 생각했어. 어쩌면 동현이도 너한테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고…….”
소영이는 내가 제대로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아니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도 기가 차서 하마터면 소영이의 얼굴에 달려들어 “와아!” 하고 와락 소리를 지를 뻔했다. 평소에 둔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이 애가 실은 꽤나 되바라진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다. 변명할 여지도 없이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 같았다.
좀 심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소영이는 동현이와 내 사정에 있어서 엑스트라나 소품 정도에 불과했다. 그저 동현이의 반에 찾아가기 위한 구실일 뿐이어서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소용에도 닿지 않는 그런 존재 말이다. (이런 나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 누구나 인간관계 절반 이상은 그런 상대들로 채워져 있기 마련이니까.) 그런 그 애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나와 동현이 사이로 고개를 쳐들며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내 목덜미를 움켜쥐고 낚아채다시피 하면서 말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음모나 함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로서는 소영이를 한 대 갈겨버린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만약 그때 내가 차라리 소영이를 한 대 치고 말았다면, 하다못해 그대로 일어나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면, 나는 지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지금보다 멋지고 강하지만, 훨씬 더 멍청하고 단순한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때 나는 소영이에게 따귀를 날리는 대신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물어보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동현이가 뭐래?”
그것은 내 자신의 패배를 공공연히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모든 것은 음모나 함정이 아니라 일종의 공모가 되어버린 것이다. 소영이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저기, 별말은 안 했어. 아, 너보고 좋은 애라고 하더라. 정말이야. 성격도 좋고 차분하다고 칭찬하면서 좋은 애 같다고 했어. 근데 자기가 요새 성적이 많이 떨어져서 좀 여유가 없다면서, 걔가 요새 그것 때문에 고민이 많나 봐. 하여간 동현이도 잘 알았다고 대답하긴 했어. 뭐랄까, 내 생각에는 동현이도 너한테 관심이 있는 거 같긴 해. 아예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아. 글쎄, 내가 뭐라고 확실하게 말하긴 좀 그렇고……. 하지만 일단 내가 말은 잘 해놨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왜 그런 거 있잖아, 자꾸만 옆에서 누가 거들면 마음이 은근히 기울어지는 거.”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콧바람을 훅 하고 내보냈다. 아마도 잠시 숨을 멈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맥이 빠지고 화가 난 나머지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이것은 도대체가 애매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보기에 따라서, 혹은 몇 마디를 슬쩍 보태거나 빼내면, 동현이의 대답은 고백의 말도 거절의 말도 될 수 있었다. 사실 동현이가 저렇듯 애매하게 얘기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설사 문자 그대로는 저렇게 얘기했다고 하더라도 분명 뉘앙스라든가 표정 등에서 의중이 드러났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구슬려보아도 소영이는 흐리터분하게 아까 얘기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냥 나는 동현이 말을 그대로 전한 것 뿐이야. 무슨 뜻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차라리 웃어버릴까 하고 생각했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시궁창에 내던져진 꼴이었고 무엇 하나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최소한의 품위조차 지키지 못한 채 엉망진창이었다. 물론 전에도 나에 대한 동현이의 감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동현이 역시 내 감정을 모른다는 점에서 나는 언제까지고 떳떳하고 느긋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발전도 없지만 결코 퇴보하는 일도 없는 무한하고 평온한 여지가 보장되어 있었다. 누구를 저울질할 일도 내가 저울질당할 일도 없이 공정하고 공평했던 것이다. 세상은 자신의 결함 그대로 완전하고 투명했다. 그런데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두고 동현이와 소영이가 이미 흥정을 끝냈으며, 막상 당사자인 나는 자신이 얼마에 팔렸는지 확인조차 할 수 없다니 어떻게 기가 차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내가 새삼스럽게 다시 동현이에게 고백하러 간다는 건 더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고백은 고사하고 동현이와 마주치는 것조차 끔찍하게 여겨졌다. 큰 돌을 입 안 가득 물고 억지로 삼켜야만 하는 심정이었다.
그때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예비 종이 울렸다. 운동장에 있던 아이들이 종소리에 이끌리듯 교실을 향해 주섬주섬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영이도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꼼짝 못하고 앉아 있는 내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앞으로 더 잘 할게. 꼭 너희 둘이 잘되게 도와줄게.”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자리에 앉고 나서야 소영이가 내게 단 한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너무 분해서 책상에 머리를 묻고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울음이 멈추었을 때쯤, 나는 이 모든 게 결국 나의 불찰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소영이가 소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어야만 했다. 또한 소영이를 얕보는 일은 바로 내 자신을 얕보는 일이었다는 것도 알았어야 했다. 그 어떤 정해진 규칙도 없으며, 그 무엇도 가능하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