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으로 진급하면서 나와 동현이는 다른 반에 배정되었다. 극적으로 같은 반이 되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쩐지 분명히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크게 실망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동현이에 대한 내 마음도 이렇게 흐지부지되는 건가 싶어 허탈했고, 역시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때 소영이가 아니었다면 동현이와의 이야기는 이렇게 싱겁게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소영이는 나와 동현이와 함께 같은 반이었던 아이다. 또 함께 술을 마시던 예닐곱 명의 친구들 중 한 명이기도 해서 동현이에 대한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친한 것은 아니어서 내 관심 밖이었는데, 반 배정 발표가 끝나고 맥없이 앉아 있던 나에게 소영이가 다가왔다.
“동현이하고 같은 반이 안 돼서 실망했지? 그렇지만 내가 동현이하고 같은 반이 됐으니까 나를 핑계 삼아 우리 반에 놀러 오면 되잖아.”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왜 내가 이 생각을 먼저 하지 못했는지 자책했을 정도였다. 어째서 방법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지레 물러서고 말았을까? 오히려 소영이 쪽에서 자청해주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나는 머리를 조아리며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소영이에 대해 말하자면 평소 소심하고 순진해 보이는, 한마디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아이였다. 반 친구들과 붙임성 있게 잘 어울려 다녔는데 친구들이 소영이를 좋아했다기보다는 소영이 쪽에서 친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 같았다. 비위가 좋달까, 성격이 좋달까. 오지랖도 넓어서 주위 사람 중 누군가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양호실로 달려가 약을 타 오거나 이마를 손으로 짚어주며 수선을 떨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그 애를 챙겨주게끔 되었고, 그것이 그 애가 친한 친구도 없이 우리들의 술자리에 낄 수가 있었던 이유였다. 모두 그 애를 반겼다기보다는 딱히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처음부터 나는 그 애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별히 싫다는 건 아니지만 어딘지 좀 껄끄러웠다. 누구에게나 지나치게 겸손한 모습도 의심스러웠고 말이다.
게다가 나는 소영이 때문에 단단히 마음이 상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술자리에서 교련 선생님의 험담을 했던 때였다. 짧게 자른 머리에 꽉 끼는 검정색 치마를 즐겨 입었던 교련 선생님은 괴팍하고 미련하기로 유명해서 자주 학생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미술 시간에 사용하고 남은 종이컵 속의 노란 물감 물을 주스인 줄 알고 마셨다가 병원에 실려가 위세척을 받았던 이야기는, 한 학생이 인기 라디오 프로에 사연을 보내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일화였다.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던 학생은 며칠 후 교련 선생님에게 불려가 단단히 혼쭐이 났지만, 그 후에는 오히려 교련 선생님 스스로가 이 얘기를 자랑삼아 떠벌리고 다녔다. 또 아버지가 독일 사람이라 태생적으로 머리가 밝은 갈색이었던 한 여학생에게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하라고 지시한 것이 크게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학부모가 인종차별이라며 강하게 항의하는 바람에 교육청까지 불려 갔지만, 교련 선생님은 왜 그것이 인종차별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아이가 친구들과 격이 없이 어울리게 하기 위해서였노라고 끝까지 항변했다고 한다. 이런 크고 작은 일들로 학생들 입에 오르내리는 동안 교련 선생님에 대한 험담은 언제나 안전하고 유쾌한 심심풀이로 굳어져 있었다. 특히 그날 나는 교련 선생님에게 복장 검사 문제로 된통 혼이 났던 터라 기꺼이 교련 선생님을 술자리 안줏거리로 삼았던 것이다. 예상대로 친구들은 이 화제를 반겨주었고 친구들의 맞장구에 신이 난 나는 더 무지막지한 농담들을 떠들어댔다. 그런데 왁자지껄함이 조금 가라앉을 무렵 소영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그 선생님도 힘들지 않을까? 여군까지 나온 분이라던데, 아무래도 학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거야. 물론 선생님한테 엉뚱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런 실수들도 인간적으로 보여서 싫지 않던데. 좋은 대학 나왔다고 거들먹거리는 다른 선생님들보다는 훨씬 낫잖아?”
그 순간 우리 모두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우리 중 누구도 그 선생님을 정말로 미워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놀려먹기에 좋았을 뿐 악의 같은 건 없었던 것이다. 그 점을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묵인해주고 있었던 것인데, 소영이가 엉뚱하게 그 점을 구구절절 걸고넘어진 것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건지, 아니면 그저 상관하지 않는 건지, 그도 아니면 오히려 만족스러워하는 건지, 구별할 수 없는 담백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그런 소영이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마디 핀잔이라도 주려는데, 친구들이 돌연 소영이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지. 좀 어리버리해서 그렇지 악질은 아니잖아?”
“뭐, 하긴 여자가 군대까지 다녀왔으니, 대단한 거지.”
“그 선생님만큼 시험 점수로 차별하지 않는 선생님도 드물어.”
“솔직히 그 정도면 착한 거야.”
“맞아, 졸업하면 그 선생님 생각이 제일 많이 날 것 같아.”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모두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다들 소영이처럼 담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두 이 정도로 단순한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약삭빠른 것일까? 이렇게 되면 처음 말을 꺼냈던 내가 본의 아니게 가장 큰 창피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감추며 모른 척 술잔만 기울여야 했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소영이보다 나의 유치함을 탓할지도 모르겠다. 또 누군가는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하고 내가 느낀 모욕감을 이해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이것이 치사스러울 정도로 사소한, 아니 사소하다 못해 조잡한 일에 불과하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 소영이가 더욱 못마땅해진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자 그 모든 일들이 까마득하고 하찮게 여겨졌다. 나는 마치 소영이가 내 은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내민 두 손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뒤로 동현이와 내 관계에 어떤 진전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막상 동현이를 보러 그 반에 가서도 동현이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소영이와 싱거운 장난만 치다가 돌아오기 일쑤였다. 때로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교과서나 노트를 빌리기도 했지만 그것도 단지 그뿐이었다. 빌려 온 책에 편지라도 끼워서 돌려주라고 소영이가 열심히 나를 설득했고 주변의 친구들도 고백해버리라고 난리였지만, 나는 구태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진심으로 아무런 부족도, 불편도 없었기 때문이다. 추억하듯 사랑하는 것이 왜 충분치 않단 말인가. 조건 없는 사랑이 주는 빈틈없는 고독이 나는 좋았다. 그 누구도, 동현이마저도 내 사랑을 방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내 사랑은 온전히 나 자신만의 것이라는 사실에 커다란 만족과 자유를 느꼈다. 한마디로 나는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모든 것이 뒤집어지고 말았다. 단정하게 걸어가던 내 뒤통수를 누군가 손바닥으로 후려갈기는 식으로 말이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년 2학기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별안간 점심시간에 소영이가 나를 운동장 벤치로 불러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다며 꽤나 심각한 모습이어서 나는 조금 얼떨떨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와 소영이가 나눌 만한 심각한 이야기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나에게 무슨 고민 상담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그 또한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누군가 소영이에 대해서 내게 물어 온다면 친하다고 밖에는 우리 사이를 설명할 길이 없겠지만, 소영이가 내게 고민 상담을 해 오는 건 좀 부자연스럽고 의아한 일이었다. 사실 동현이가 없는 교실 밖에서 소영이와 나는 겨우 인사나 주고받는 대면한 사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정도로 나는 소영이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또 아는 것도 없었다.
9월 중반이었지만 늦여름의 열기가 아직 수그러들지 않아서 한낮의 널따란 운동장은 뜨거운 김을 무럭무럭 내고 있었다. 반면 우리가 앉아 있는 나무 그늘 밑은 서늘하기까지 해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가을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두 계절이 서로 자리를 바꾸려고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 같은 날이었다. 소영이는 할 얘기가 있다며 나를 불러내놓고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도 선뜻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그저 갈색 구두 끝으로 발밑을 지나가는 개미들을 하나씩 눌러 죽이고 있었다. 나는 답답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렇다고 내가 먼저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 지저분한 광경을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소영이에게 큰 골칫거리가 생긴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가령 정말 친한 사람들에게는 더 말할 수 없는 그런 구질구질한 종류의 고민 말이다. 그럴 때는 차라리 아무에게나 적당히 털어놓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소영이가 고개를 들고 내 눈치를 보았을 때, 나는 이 용건이 나에 대한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예감했다. 그래서 일부러 더 처량 맞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타이르듯이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인데 뜸을 들이고 그래. 무슨 일 있어?”
소영이는 한 번 더 망설이는 듯했지만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동현이에게 말 안 할 거야?”
“뭐?”
나는 정말로 깜짝 놀라 외쳤다. 왜 갑자기 동현이 얘기를 꺼내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고백 말이야. 안 할 거야?”
그리고 소영이는 다시 고개를 숙여 마침 발밑을 기어가고 있던 커다란 개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도 얼떨결에 소영이를 따라 개미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정말이지 드물게 큰 개미였다. 그 순간 내 머리에 퍼뜩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