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순진하게 (11)

by 곡도




모두들 자신 앞에 놓인 소주잔을 추켜올리며 “위하여”를 소리 높여 외쳤다. 15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주점 안에 쩌렁쩌렁 울렸고, 그 뒤로 잔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들이 사방에서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확실히 수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행위에는 어떤 감동 같은 것이 있었다. 아마도 그건 일단 적지 않은 인원수 때문일 테고, 한편으로는 참가자들이 서로 별 상관없는, 실상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다르고 소원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깨를 기대고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해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무엇이든지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감상에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동질감을 느끼며 뭉칠 수 있는 것은 ― 적어도 내 경험에 의하면 ―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잠시나마 가졌던 동질감을 부끄러워하면서 서둘러 이질감을 회복함으로써 자존심을 되찾곤 했다.) 그러니 이런 순간에 누군가 의형제라도 된 듯 지나치게 친한 척 굴거나, 함부로 껴안거나, 짓궂게 놀리면서 모욕을 주거나, 혹은 내키는 대로 윽박지르며 자칫 분에 넘치는 실수를 하더라도 그 사람을 경박하다고 단정해선 안 된다. 그 사람은 켜켜이 쌓여 있던 소외감을 털어내는 데 급급한 나머지 자신을 추스르지 못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나 취기가 돌기 시작하자 처음의 왁자지껄했던 활기도 잦아들고 점차 분위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여전히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지만, 일일이 안부를 나누고, 술잔도 번갈아 주고받고, 건배도 질릴 만큼 한 후여서 지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땐 은연중에 익살꾼이 기다려졌고, 또 거기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두 명의 익살꾼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과에서는 창준 선배가 바로 그런 익살꾼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창준 선배와 어울릴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 학과뿐만 아니라 학교 전체에서도 내로라하는 유명인이었는데,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일단 창준 선배가 참석한 파티나 술자리에서는 늘 무언가 끝내주는 일이 벌어진다고들 했다. 그래서 노는 자리에서는 모두들 창준 선배를 초대하고 싶어 했고,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무성한 이야기들이 따라다녔다. 사실 창준 선배는 평소 풍문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너그럽게 말하자면 물색 모르는 철없는 사람, 좀 거칠게 말하자면 천박하고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저기 눈치 없이 끼어들기를 좋아했고 분란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떠벌리거나 친구나 연인 사이를 갈라놓는 일들을 무척이나 즐기는 것 같았다. 한 여자 선배는 언젠가 그를 가리켜 ‘쓰레기’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나이트에서 춤추던 도중에 창준 선배가 자신의 가슴을 덥석 만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린아이가 지나가던 여자의 치마를 들추고는 뭐 어떠냐는 눈빛으로 뻔뻔하게 쳐다보는 식이었다고 분해했다. 그렇다고 그에게 야무진 반골 성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막상 일이 커지고 나면 한걸음에 달려가 싹싹 빌고는 했는데, 그것이 더욱 사람들의 심경을 뒤틀리게 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보다 더 안 좋은 소문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쉬쉬하면서 떠도는 창준 선배의 가장 지독한 일화는 창준 선배가 신입생 때 한 3학년 여자 선배를 말 그대로 ‘따먹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숫처녀였는데 (이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핵심에서 벗어났건 아니건,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서 꼭 강조되곤 했다) 아마도 그녀는 창준 선배에게 진심으로 반했었기 때문에 응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창준 선배는 며칠 지나지 않아 자신이 아무개와 잤다고 사방팔방에 떠벌리고 다녔고, 결국 그 여자 선배는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그 때문에 창준 선배는 그 당시 3, 4학년 남자 선배들에게 걷지도 못할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이 소문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창준 선배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럴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해버리곤 했다. 이상하게도 본인 역시 이런 소문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반론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방관적이어서 때로는 자신에 대한 소문이 더 퍼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심지어 창준 선배가 자신에 대한 새로운 소문을 전해들을 때면 퍽이나 즐거워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 소문 역시 돌고 돌다가 다시 창준 선배의 귀로 들어가 그를 즐겁게 했을 것이다.

어쨌든 창준 선배에 대한 얘기는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창준 선배가 특별히 자신에게 해를 끼친 일이 없었는데도 유난히 그를 싫어했던 준식 선배마저 언젠가 술자리에서 이렇게 외쳤을 정도였다.

“야, 창준이 그 새끼, 어휴, 호로 자식, 그 인간 말종 새끼. 근데 그 새끼가 아니었으면 내가 무슨 맛으로 학교를 다녔겠냐.”

마치 오래된 집에 떠도는 기괴한 유령의 소문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 듯, 더 이상 유령을 믿지 않는 요즘 사람들에게 창준 선배는 때로는 재미있고, 때로는 역겹고, 때로는 으스스한 괴담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듯했다.

이날도 창준 선배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0시가 넘어 누구 할 거 없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쯤 창준 선배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별안간 양손에 든 소주병을 요란하게 부딪치며 테이블 위로 뛰어 올라갔다. 돌아보니 어느새 그의 입술에는 붉은색 립스틱이 엉망으로 칠해져 있었고 어느 여학생의 것으로 보이는 노란색 머플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런 창준 선배를 보자마자 사람들은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들끓어 올랐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휘파람 소리와 테이블 두드리는 소리가 스스로를 흥분시켰고, 자극적인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대 때문에 사람들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150여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지르며 손을 흔들어대자 창준 선배는 돌연 쑥스러워하면서 탁자 아래로 내려갈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 순간 모두의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려가기는커녕 어느새 새된 웃음을 짓더니 방금 딴 맥주병 하나를 테이블 위에서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마침 주점에서 틀어놓은 댄스 음악에 맞추어 맥주병을 사타구니 부근에 대고 음탕한 몸짓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주점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고성을 지르고, 웃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창준 선배는 점점 더 난잡한 몸짓을 해 보였는데, 그 몸짓이 때때로 너무 음란해서 가끔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곁눈질로 바라봐야 할 정도였다.

급기야 창준 선배가 탁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앞뒤로 몸을 흔들어대자 허벅지 사이에 끼여 있던 병에서 맥주 거품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자지러지는 신음이 튀어나왔고, 순발력 있는 여자 선배 하나가 얼른 컵에 맥주를 받아 마시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여자들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에 자극을 받았는지 이번에는 남자 선배 하나가 뛰어나가 아예 병 주둥이를 입에 물고 맥주를 들이켰다. 그 광경에는 남자들까지 여자들과 함께 꺄악 하고 비명을 질러댔을 정도였다.

사타구니에 끼고 있던 맥주병이 텅 비자 창준 선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윗도리를 벗어 던졌다. 그의 맨가슴에는 브래지어가 헐렁하게 늘어져 있었다. 진보라색 레이스와 리본이 잔뜩 달려 있는 화려한 것으로 대학생 여자들이 쓸 만한 것이 아니었다. 창준 선배가 미리 준비해 온 게 분명했다.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브래지어 양쪽에 휴지를 잔뜩 말아 넣어 한껏 부풀어 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등을 대고 누워서 여자 목소리를 흉내 내며 외쳤다.

“야, 날 따먹고 싶은 사람은 다 덤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우루루 앞 다투어 뛰어나갔다. 그리고 한 사람씩 창준 선배 위에 몸을 겹치고는 마치 섹스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움직여댔다. 남자, 여자를 가릴 것이 없었고 곧 차례를 기다리는 긴 줄이 생겼다. 창준 선배는 두 손으로 상대방의 엉덩이를 쥐어짜며 우스꽝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거나 두 발로 상대의 허리를 감기도 했다. 모두 비명을 지르고 욕을 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실컷 웃었다. 너무 웃다가 눈물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고 참을 필요도 없는 즐거움이어서 모두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이 난잡한 행위에 대해 뒤에서 수군대는 학생들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함께 교성을 질러대던 그들이 나중에 와서 딴 말을 했다는 사실보다는, 아무도 상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 일을 구태여 다시 되새기고 있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당장 이 자리, 이 순간만큼은 모든 사람들이 창준 선배를 열렬히 숭배했다.

그렇게 광란에 가까운 열기 속에 술자리가 끝이 나고 모두들 와글거리며 주점에서 나와 2차 갈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1차 때 그렇게들 즐거워했으니 꽤 많은 사람들이 2차에 남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2차에 가겠다고 의사를 밝힌 사람들은 고작 서른 명 정도에 불과했다.

“민주야, 너는 집에 안 갈 거야?”

평소 친하게 지내던 현경이가 다급한 표정으로, 혹시 누가 억지로 잡아끌기라도 할까봐 성가시다는 듯이 재빨리 나에게 물었다.

“아, 나는 2차에 가려고 하는데.”

“으이구, 그럴 줄 알았다. 그럼 나 먼저 갈게.”

“왜에? 더 있다가 가지. 아까 재미없었어?”

“당연히 재밌었지. 너무 웃다가 다리에 쥐가 다 났다니까. 근데 이제 가봐야 돼. 벌써 11시가 넘었잖아.”

저토록 당당하고 확실하게 정돈되는 마음이라니, 가히 존경스러울 정도가 아닌가? 조금 전까지 함께 미친 듯이 웃고 소리치고 부둥켜안다가 곧바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털고 일어날 수 있다는 건 나로서는 의아하다 못해서 경탄할 만한 일이었다. 나는 서로서로에게 인사를 나누며 뿔뿔이 흩어지는 100여 명의 사람들을 아연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이렇게 남아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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