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발, 다들 가는 거냐? 너희들 진짜 그러기야? 싸가지들 하고는.”
내 옆에 서 있던 학생회장 경식 선배에게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기 때문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세히 보니 선배의 하얀색 니트 앞섶에는 주황색 소스인지 국물인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한번 뭉쳤으면 2차까지는 기본이지, 기본. 이것들이 기본을 못 배워먹었어. 후레자식들.”
경식 선배는 불과 세 시간 전에, ‘2차 이후부터는 개인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라고 의젓하게 외쳤던 자신의 말을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남은 우리 30여 명은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마치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처럼 주점 앞에 어수선하게 서 있었다.
“뭘 그래. 남은 사람들끼리 더 재미있게 놀면 되지.”
창준 선배가 경식 선배의 중얼거림에 대꾸했다. 그러나 그 역시 썩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낯설어 보이는 창준 선배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미 얼굴의 립스틱도 말끔히 지운 상태였고 담배를 피우는 데 열중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우스워 보이지 않았다. 사실 말하자면 그는 미남까지는 아니더라도 잘생긴 얼굴이라고 할만 했다. 단지 자신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그의 얼토당토않은 행동 때문에 그 점을 간과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의 면 티 위로 드러나는 조금 마른 몸의 실루엣을 눈여겨보면서, 아직도 안에 보라색 브래지어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 너도 담배 한 대 필래?”
별안간 창준 선배가 내 옆에 서 있던 희진이에게 담배를 권했다.
“너 예전에 담배 문제로 최 교수님하고 한 판 붙었다면서. 꼰대 코를 아주 납작하게 해놨다던데. 멋지더라. 한 대 펴.”
“아니에요. 이제 담배 끊었어요.”
희진이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나는 희진이가 담배를 끊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혼자 무안해졌다.
“에이, 왜? 힘들게 쟁취한 여성의 권리인데.”
“그때 교수님하고 싸운 건 담배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그리고 담배를 끊은 건 여자라서가 아니라 기관지가 약해서예요.”
희진이의 지나치게 또박또박한 대답에 창준 선배는 “그래도 폼 나잖아?”하고 웃어 보이더니, 반쯤 태운 담배를 바닥에 던지며 외쳤다.
“자자, 그만 우리도 2차를 즐기러 가자.”
그 순간 새로운 ‘우리’가 공식적으로 선포된 것이다. 그제야 모두들 안색을 펴고 자신이 알고 있는 이런저런 술집들을 주워섬겼다. 결국 우리가 간 곳은 학교 후문 쪽 허름한 건물 지하에 있는 호프집이었다. 그곳은 말이 호프집이지 어느 대학교 근처에나 한두 개씩은 있을 국적 불명의 술집이었다. 소주, 맥주, 싸구려 양주, 정종 등 안 파는 술이 없었고, 안주도 양식, 중식, 한식, 약간의 퓨전 일식까지 싼값에 마련되어 있어서 대학생들에게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보통 술자리가 2차쯤 되면 전체적으로 어울리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패가 갈리기 마련이었다. 친한 사람들끼리 손쉽게 모이기도 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어서, 친해서, 안 친해서, 오랜만에 만나서, 좋아하는 안주가 있어서 등의 이유로 구성원은 대중이 없었다. 한 패당 인원수는 자연스럽게 대여섯 명 선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정도가 머리를 모으고 작당하기에 좋았다. 세상도 딱 그만 한 크기로 좁아져서 함께 모여 있는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전부 뜬소문처럼 흐릿해졌다. 그래서 세상을 안주 삼아 거칠 것 없이 큰소리도 탕탕 치게 되고 몇몇은 자신의 치부까지도 자랑스럽게 떠벌리곤 했다. 세상이 이토록 얕보일 때를 틈타서 자신의 결점이나 실수까지도 얕보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럴 땐 주위 사람들도 다 같이 그의 치부를 곯려대는 것이 예의이자 또 재미였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소주와 안주가 차례로 탁자 위에 차려졌다. 옆 탁자에 앉은 선배들은 어느 회사 소주가 제일 맛이 있는지 열을 올리며 다투기 시작했고, 나는 안주 접시를 받아서 부지런히 탁자 위에 늘어놓고 있었다. 막 빈대떡 접시를 내려놓았을 때, 나는 문득 건너편에 앉아 있는 희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 예감도 여운도 없이, 그저 물리적으로 시선이 잠깐 마주친 것뿐이었다. 희진이 쪽에서는 나와 눈이 마주친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듯 다시 고개를 숙이고 땅콩 껍질을 까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나도 자리에 앉아 안주를 뒤적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때부터 희진이가 신경이 쓰여서 마음이 산만해졌다. 사실 희진이가 이런 자리에 참석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녀는 술을 꽤 잘하는 편이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뚜렷한 목적도 없이 부대끼는 자리는 영 불편하다고 했다. 그래서 신입생 환영회 때에도 처음에 단 한 번만 참석했을 뿐 그 뒤로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단합 대회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2차까지 남아 있다는 건 꽤나 의외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그녀 옆자리에 창준 선배가 앉아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두 사람과 또 다른 남자 선배 한 명이 무언가 중요한 용건이라도 있는 것처럼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주변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시끄러운 음악소리 때문에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가끔씩 창준 선배가 이빨을 가지런히 내보이며 해죽이 웃었을 뿐이었다.
정색을 하고 있는 창준 선배의 얼굴은 확실히 멀끔하게 생겼다고 할만 했다. 특히 눈썹이 짙고 가지런히 나 있어서 반듯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는 왜 창준 선배가 우스꽝스러운 광대 역할을 자처하는지 더욱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뒤틀린 성격은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익힌 천박한 습성 탓인 경우가 많았지만, 이렇게 외모가 멀쩡한 청년을 상대로는 저절로 너그러워지기 마련이었다. 어쩐지 거기에는 대단한 사연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 말하자면 어떤 남모를 슬픔 같은 것 때문이 아닌가 싶어서,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을 주시하게 되는 것이다.
잠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경식 선배의 술주정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다시 희진이 쪽을 돌아보니 남자 선배는 어디론가 자리를 옮기고 창준 선배와 희진이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얘기를 하는 쪽은 주로 창준 선배인 것 같았고 희진이는 간간이 대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창준 선배는 희진이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저 둘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일까? 창준 선배가 무슨 농담이라도 했는지 희진이가 한 손으로 목을 감싸 쥐며 웃음을 터트렸다.
“김민주, 오랜만이다?”
갑자기 정호 선배가 내 옆자리에 앉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창준 선배와 희진이에게 완전히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는 게 스스로도 당황스러워서 부랴부랴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오빠, 오랜만이에요. 잘 계셨어요?”
나는 몇 달 전, 과제에 쓰일 컴퓨터 프로그램 제작 때문에 도움을 받으면서 정호 선배를 알게 되었다. 정호 선배로 말하자면 얌전하고 침착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특히 눈이 너무 작았다) 절제된 친절함을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아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호감을 느끼게 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선배는 얘기를 나눌 때 상대방 여자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해괴한 버릇이 있었다. 정말이지 눈동자를 풀로 딱 붙여놓은 것처럼 집요하게 쳐다보는 바람에 상대방은 같이 눈을 맞추어야 할지 아니면 피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곤 했다. 그런 선배의 눈빛은 두 팔을 휘둘러 털어내고 싶을 만큼 상대방을 겸연쩍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정호 선배는 어느 여자에게나 그렇게 행동했고, 그것이 선배의 습관이라는 걸 눈치 챈 후로는 나도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신입생 중 선경이란 아이는 그런 정호 선배의 행동을 오해한 나머지 정말로 선배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그것이 단지 선배의 습관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동기야 어떻게 되었든 일단 동요하고 나면 멈추기 쉽지 않은 게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사실 뭐니 뭐니 해도 정호 선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창준 선배의 친한 친구라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선배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정호 선배 같은 사람이 왜 창준 선배와 어울려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었다. 고약한 소문이 무성한 창준 선배와 달리 정호 선배는 친구들과 교수님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정호 선배가 왜 창준 선배와 가깝게 지내는지보다 창준 선배가 왜 정호 선배와 가깝게 지내는지에 대해 더 큰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나는 정호 선배가 내 잔에 술을 따라주는 사이 힐끗 희진이를 바라보았다. 희진이는 여전히 창준 선배와 무언가를 소곤거리고 있었다.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칼을 배경으로 희진이의 옆얼굴이 그림처럼 하얗고 단아해 보였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희진이를 보면서 어떻게 쟤들이 친구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할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희진이가 민주 같은 애와 어울리는 게 영 이상하다고 하겠지. 나는 희진이에게 아무 말이라도 건네보려다가 갑자기 경식 선배가 버럭 큰 소리를 치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이야아, 진짜 신입생 때가 좋았지. 그러고 보니 옛날 생각난다. 나도 그때는 참 순진했었는데, 세상에 찌들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됐네. 너희들도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돼. 세상이 그리 만만치가 않아요. 특히 여학생들, 너희들 남자 조심해라. 나도 남자지만 남자들은 다 늑대거든. 식욕이 더 강한 늑대와 식욕이 좀 떨어지는 늑대가 있을 뿐이지 세상에 초식인 늑대는 없어. 하여간 찝쩍거리는 남자가 있으면 일단 나한테 데려와 봐. 내가 어떤 놈인지 봐줄 테니까. 남자는 남자가 보면 딱 답이 나오거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