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순진하게 (13)

by 곡도




술자리에서 능글거리는 선배들의 작태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던 터라 나는 그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옆에 있던 정호 선배가 가소롭다는 듯이 놀려댔다.

“여자애들 앞이라고 폼 더럽게 잡고 있네. 내가 볼 때는 네놈이 제일 요주인물이야. 딱 이마에 쓰여 있구먼. 나. 지. 금. 꼴. 려. 요.”

“이야, 그렇게 티 나? 사실 말이지, 나 요즘 진짜 꼴려요. 가을 타나 봐. 기분도 싱숭생숭하고.”

경식 선배의 너스레에 모두들 속없이 웃었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창준 선배가 정호 선배를 가리키며 찌르듯이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야 야, 모르는 소리 하지 마. 너보다 정호 이 자식이 더 급해. 아직 껍질도 못 벗겼으니 얼마나 꼴리겠냐.”

“네?”

“씨발, 이 자식 아직 버진이라고.”

순간 그것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할 수가 없어서 모두들 그대로 얼어붙었다. 차라리 다 함께 와아 하고 웃어버렸다면 좋았을 테지만 눈치를 보다가 그만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렇게 어색하게나마 대충 넘어갔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별안간 경식 선배가 박수를 치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에이, 설마요. 말도 안 돼. 아직까지 딱지도 못 뗀 숫총각이라는 거야? 지금 그 나이에? 아이고, 동네 사람들, 여기 좀 와 보소. 아주 큰일이 났네, 큰일 났어.”

경식 선배가 당장 어디론가 알리러 달려 나갈 것처럼 법석을 떠는 바람에 희진이도 나도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않는 사람은 정호 선배뿐이었다. 아니, 정호 선배도 눈을 내리깐 채 미소를 짓고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웃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입가의 근육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져서 웃고 있다기보다는 무언가 씹고 있는 모양새였다. 만약 호탕한 사람이었다면 농담으로 받아치며 적당히 웃어넘길 수도 있었을 테지만 정호 선배에게 그런 융통성은 없는 모양이었다. 거기다가 창준 선배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아, 진짜라니까. 이 새끼가 이거 스물여덟 살이나 돼가지고 아직도 순수의 시대라니까. 아아니, 니들 왜 웃냐? 그게 흉은 아니잖아. 오히려 존경받을 일이지. 요즘 세상에 여자애들도 우습게 생각하는 혼전 순결을 사지 멀쩡한 사내놈이 지키고 있는데, 여성부에서 상장이라도 하나 줘야 되는 거 아니냐? 아니, 그건 보건복지부 소관인가? 하여간 ‘순결시민상’ 이런 거 하나 만들어줘야 한다니까.”

창준 선배의 너스레에 경식 선배는 박장대소했고 사람들도 덩달아 웃었다. 그러나 꼭 우스워서 웃었다기보다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야, 씨발, 그만해. 애들 앞에서.”

결국 정호 선배가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씹고 있던 걸 뱉어내듯이 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창준 선배는 정호 선배를 흘끗 쳐다보았을 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말이 나온 김에 너희들, 내 첫 경험 얘기해줄까?”

창준 선배는 어깨를 흔들며 우리를 향해 미끈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었다. 물론 안 될 건 없었다. 나 역시 고리타분하게 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성 담론이란 게 이런 식으로 개인의 경험을 떠벌리는 걸 뜻하는 건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딱히 결벽을 떨 일도 아니었다. 다만 아직 아무도 술에 취하지 않았을 뿐더러 아무런 전희도 없었는데 불쑥 이런 이야기를 펼쳐놓는다는 건 오히려 듣는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그러니까 군대 가기 두 달 전쯤이었나. 어느 날인가 집에 혼자 앉아 있는데 문득 총각 딱지는 떼고 군대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한번 그런 생각이 드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라고. 그런데 그때 따로 만나는 여자도 없었고, 막상 맘먹고 하려니까 막막한 거야.”

여자라도 사지 그랬냐고 경식 선배가 물었다.

“에이, 아냐. 난 창녀들은 딱 질색이라서. 내가 아무리 굴러먹고 다녔어도 지금까지 그런 여자들을 거들떠본 적은 없었어. 그 여자들한테서는 왠지 유통기한이 지난 인스턴트 식품 냄새가 나는 것 같거든. 밀봉된 포장 용기 안에서 그대로 상해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 있잖아.”

나는 이 대화가 거북한 것인지 아니면 세련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여간 그 여름방학 내내 난 여자를 찾으러 온 서울을 무작정 헤매고 다녔어.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가 길거리에서 하룻밤 잘 여자를 찾는다는 게 말처럼 쉬워야 말이지. 그러다가 군대 가기 일주일 전쯤인가, 채팅에서 어느 여자애랑 우연히 얘기하게 됐는데 걔가 다짜고짜 원나잇을 하겠냐고 물어보는 거야. 세상에, 이게 웬 떡이냐, 땡큐지 뭐. 곧바로 만나서 술 한 잔하고는 바로 여관으로 직행했지. 그런데 방에 들어가서 보니까 되게 어려 보이더라고. 한 고1쯤? 요즘 애들은 발육이 좋아서 알 수가 있나.”

“몇 살인지 물어보지 그랬어?”

이번에도 경식 선배가 물었다.

“에이, 미쳤냐, 나이를 물어보게. 괜히 골치만 아프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냐. 잘 들어봐. 하고 보니까, 글쎄, 아, 걔가 숫처녀더라고.”

“숫처녀?”

경식 선배가 지극히 작위적으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우리들은 그 기세에 눌려 마치 숫처녀여서 혼나고 있는 건지 반대로 숫처녀가 아니어서 혼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걔가 돈을 요구하진 않았어?”

4학년 주영 선배가 어깨너머로 듣고 있다가 슬며시 물었다.

“아냐. 나중에 그냥 보내기가 뭐해서 택시비 하라고 손에 3만 원 쥐어 줬는데 그것만 받더라고.”

“돈이 목적이 아니면, 경험도 없는 애가 왜 그런 거야?”

다시 주영 선배가 물었다. 주영 선배가 정확히 어느 부분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아냐? 나도 모르지. 걔도 그냥 나처럼 그날 당장 딱지를 떼버리고 싶었나 보지. 그건 마치 크고 무거운 꼬리 같은 거니까. 언제까지나 엉덩이 뒤에 질질 끌고 다닐 순 없잖아.”

“연락처라도 받아놓지 그랬어요.”

경식 선배가 말했다.

“연락처? 그런 걸 촌스럽게 어떻게 물어보냐. 게다가 일주일 후면 군대도 가야 되는데. 그냥 여관 앞에서 깔끔하게 헤어졌어. 야아, 어쨌든 기분은 진짜 째지게 좋더라고.”

창준 선배가 말을 끝내자마자 경식 선배는 정호 선배의 어깨를 잡으며 낄낄거렸다.

“형도 채팅 좀 부지런히 해야겠네. 운 좋으면 누구 하나 걸릴지도 모르잖아. 근데 좀 서둘러야겠다. 이러다가는 여기 1학년 여자애들이 먼저 딱지를 떼겠어. 아니, 벌써 뗀 애들도 있을 걸? 솔직히 얘들이 속으로 형을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남자가 얼마나 못났으면 스물여덟 살 먹어서까지 숫총각일까 우습게 볼 거 아냐. 요즘은 남자고 여자고 상대가 경험 많은 걸 오히려 더 좋아한다니까. 야아, 이것 참, 내가 여자면 좋은 일 하는 셈 치고 확 한번 대주겠구만, 그럴 수도 없고. 아니, 그냥 내가 눈 딱 감고 한 번 대 줘? 에이, 아무리 급해도 그건 아니지. 야 야, 너희들 중에 누가 이 불쌍한 중생 하나 구제하는 셈 치고 한 번 해줘라, 응? 불교에 몸보시라는 것도 있잖아. 그것도 다 공덕을 쌓는 일이야.”

우리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어대는 경식 선배를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보았다. 취하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제 2의 창준 선배라도 되려는 것인지, 경식 선배는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마음껏 지껄여대고 있었다. 스물여덟 살에 아직 숫총각이라는 정호 선배보다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목구멍에서 말을 쏟아내는 경식 선배가 훨씬 더 희한해 보였다.

“야, 그만하랬지. 씨발, 진짜 죽어볼래.”

정호 선배가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금세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 바람에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까지 모두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금방이라도 말리러 달려오기 위해 주춤거리며 일어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때 창준 선배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호 선배를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일이 커지려나보다 싶어 모두들 바짝 긴장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차분하고 냉담한 말투였다.

“야, 강경식, 너 그만 못 닥쳐? 이게 주제 파악도 못하고 설치고 난리야. 닥치고 네 인생이나 똑바로 살아. 후배들 앞에서 추태 보이지 말고. 명색이 학생회장이라는 놈이 1학년들 앞에서 처신머리 하고는. 이러니까 새까만 새내기들까지 뒤에서 깔보고 우습게보지.”

나는 정말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 경식 선배 역시 그랬을 것이다.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어르고 뺨친다더니 이게 바로 그런 격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이 세상 그 누가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 모든 장난과 냉소와 반전 속에서 애초에 자신이 누구에게 대적하고 있는지 조차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경식 선배는 새까매진 얼굴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다른 탁자로 가버리고 말았다.

경식 선배가 자리를 뜨자 창준 선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헤헤거리며 부산을 떨었다. 우스갯소리를 해대고, 정호 선배를 와락 껴안는가 하면, 우리들에게도 연신 술을 따라주었다. 창준 선배는 어쩐지 신이 난 듯했고, 정호 선배는 안색이 굳긴 했지만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나는 뭐가 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술만 홀짝이고 있었다. 아까 그것은 술자리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단순한 다툼에 불과했을까? 아니면 창준 선배가 마련한 또 하나의 쇼였을까?

어리둥절한 채 창준 선배가 따라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던 나는 정말로 취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의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들고 있던 컵을 바닥에 떨어트렸지만 깨지지 않아서 다행스럽게 여겼던 것과 (만약 깨졌다면 모두들 내가 꽤나 취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창준 선배, 아직도 얼굴에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어요”, “희진아, 술 그만 마셔. 취하겠다” 등의 아무 생각 없이 뇌까린 몇 마디의 말이 단편적으로 생각날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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