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 선배는 살인자 대부분이 엄마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다느니, 여자 연쇄살인범이 흔하지 않은 이유는 여자가 너무 감상적이고 표피적인 관계에 집착하기 때문이라느니, 만약 처벌이 없었다면 분명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만 같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연쇄살인범이 되었을 거라는 둥의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저희 집이에요.”
나는 아파트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래? 여기구나.”
“네, 감사합니다.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저기, 잠깐. 근데 말이야, 뭣 좀 물어봐도 돼?”
“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저, 네가 볼 때 나는 어때?”
“네?”
“내가 어떤 사람인 것 같냐고.”
이건 또 무슨 술주정인가 싶어 나는 당황했다.
“그야, 물론, 좋은 분이죠, 뭐. 친절하시고, 또, 누구한테나 잘해주시잖아요. 그리고, 저기, 친절하시니까.”
한 가지도 정호 선배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당장에 내 소개를 하라고 했어도 나는 이보다 더 낫게 얘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쁜 인상은 아니라는 거지?”
“그럼요.”
“그래? 저, 그럼 말이야, 우리 사귈까?”
“네?”
나는 웃음을 지으며 정호 선배의 안색을 살피다가 농담이 아닌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가로등이 점점이 이어지는 침침한 골목 너머를 이유도 없이 흘끗흘끗 노려보았다. 예상치 못했을 뿐 아니라 딱히 구미가 당기는 상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자랑스럽거나 수줍기보다는 그저 곤혹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저기, 죄송해요. 그건, 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럼 지금부터 생각해보면 되지. 그냥 부담 가지지 말고 천천히 만나보자. 그러다 보면 서로 더 좋은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정호 선배는 조목조목 차분하게 말했지만, 어딘지 좀 심드렁해 보였다.
“어차피 지금 남자 친구도 없으니까, 딱히 재지 않아도 되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내 입술 끝에서 튕겨져 나왔다 .
“죄송하지만, 저는 창준 오빠를 좋아해요.”
왜 나는 굳이 창준 선배를 끌어다 붙였을까? 그것이 정호 선배를 거절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일 뿐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상처 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데 굉장히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아, 그래?”
정호 선배가 짓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흐려지는 말끝에는 여전히 시큰둥함이 배어 있었다. 난 고개를 들어 그의 낯빛의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난 몰랐네. 그럼 내가 방금 했던 말은 없었던 일로 해줘. 나는 그저 창준이가 너하고 나하고 잘 어울린다고 하기에, 그런가 보다 싶어서 꺼내본 얘기니까. 이거 참, 나만 중간에서 멍충이가 됐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정호 선배는 이미 돌아서서 몇 발자국을 내딛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 쪽으로 휙 돌아서더니 불쑥 말을 이었다.
“아, 참, 근데, 창준이는 희진이한테 관심 있는데. 알고 있니?”
“예?”
“창준이는 희진이한테 관심 있다니까. 지금쯤 희진이한테도 말했을걸? 희진이도 오케이 했을지도 모르고. 그 자식 그런 쪽으로는 수단이 좋거든. 이상하게 여자들은 그놈한테 쉽게 넘어가더라. 혼자 착각에 빠져서 마음 주고 몸 주고, 나중에 울고불고. 너도 정신 차려. 괜히 그 꼬라지 나지 말고.”
결국 정호 선배는 지저분한 말 몇 마디를 보태고야 말았다. 만약 정호 선배가 그대로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면 나는 정호 선배에게 조금쯤 호감을 느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세련된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내가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면 한마디를 더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법이다. 흔적도 없이 시시하게 퇴장하느니 상대방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어떤 인상이라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과연 희진이가 창준 선배의 고백을 받아들였을지 궁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연인으로서의 두 사람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남녀 관계란 알 수 없으니 그럭저럭 잘 어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어울린다고 해도 참으로 기묘한 조합이 되겠지만.
다음 날 나는 강의실에서 희진이를 발견하고 태연하게 옆자리에 앉았다. 희진이는 책에서 노트로 무언가를 옮겨 적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슬쩍 말을 붙여보았지만 건성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내게 말해주지 않을 작정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내 쪽에서 먼저 찔러보기로 했다.
“어제 집에 잘 들어갔어?”
“어.”
그녀는 책장을 넘기며 짧게 대꾸했다.
“창준 선배가 집 앞까지 바래다줬어?”
“응.”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일까?
“저기, 근데.”
나는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잠깐 말을 끊었다.
“별일 없었어?”
희진이는 그제야 고개를 들더니 “무슨 일?”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어쩔까 하다가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아니, 실은 어젯밤에 정호 선배한테 이상한 얘기를 들었거든. 창준 선배가 너한테 고백할 거라고 하던데.”
“아, 그래?”
희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창밖으로 짧게 시선을 던졌다. 나는 그녀가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릴까 봐 가슴을 졸였다. 어쩌면 희진이도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곧 내게 바짝 다가와 앉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은 말이야, 어제 난리도 아니었어.”
“왜?
“내가 싫다고 하는데도 계속 안 가고 치근덕거리잖아.”
“창준 선배가?”
“그렇다니까. 내 앞을 딱 가로막더니 자기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느냐고 꼬치꼬치 따지는 거야. 내가 그냥 가려고 해도 억지로 내 팔을 잡아 끌면서, 그래서……“
그녀는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따귀까지 때렸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나서야 포기하더라고. 하여간 그런 인간하고는 다시는 상종하지 말아야 돼.”
나는 희진이의 얘기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일단은 놀라웠다. 그리고 그다음에, 그 다음에? 나는 안도했을까? 실망했을까? 알 수 없었다. 단지 내가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하지 못한 것이 못내 서운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2주일쯤 지났을까, 나는 실기실에서 다음 날 제출할 과제를 하느라 색지를 도화지에 오려 붙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민주야” 하고 부르기에 돌아보니 거기에 창준 선배가 서 있었다. 나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마침 희진이는 자리에 없었다.
“민주야, 나하고 밖에서 잠깐 얘기 좀 할래?”
보나마나 희진이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하려는 거겠지. 거절할까 하다가 역시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동기들 앞에서 이상한 눈치를 보이고 싶지도 않아서 순순히 창준 선배를 따라나섰다. 창준 선배는 예체능 건물 뒤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은 건물과 건물 틈새에 낀 여분의 공간으로 앞쪽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늘 한산한 곳이었다. 정원 주변에는 조소과 학생들이 과제나 연습용으로 만들었다가 내다 버린 인물상들과 동물 모형들, 괴상한 괴물의 형상들, 기하학적인 형태의 크고 작은 조각들 수십 개가 아무렇게나 늘어서 있었다.
“저, 무슨 일인데요?”
나는 벤치에 앉자마자 따지듯이 물었다. 그러나 탁자 건너편에 마주 앉은 창준 선배는 두 손을 맞잡고 주물럭거릴 뿐 말이 없었다. 굳게 닫힌 그의 입술을 보면서 나는 내가 소영이의 역할을 맡게 되리라 짐작했다. 한 번쯤 해보고 싶긴 했지만 막상 닥치니 썩 유쾌하진 않았다. 마침내 창준 선배가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은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게 다 사실인 건 아니야. 내가 깨끗한 놈이라는 건 아니지만 진짜 그 정도로 형편없는 놈은 아니거든. 뒤에서 남 얘기하길 좋아하는 연놈들의 수작일 뿐이지. 술자리에서 변변치 않은 안주 대신에 날 씹어대는 거야. 떠돌아다니는 모든 우스꽝스러운 소문에 내 이름을 갖다 붙이면서. 아마 그러면 얘기가 더 재밌어지는 모양이야. 말하자면 일종의 달갑지 않은 상표가 된 거지.”
그러니 희진이에게 말 좀 잘해달라는 거겠지. 그럼 쉽지는 않겠지만 얘기는 한번 해보겠다며 으스대볼까, 하는 생각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민주야, 너 나 좋아한다며?”
“예에?”
나는 얼빠진 얼굴로 더듬거리면서 되묻고는 그제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귓불이 후끈 달아올랐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건 오해라고 서둘러 해명하려 했다. 정호 선배를 거절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말이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막 입을 떼려는 나를 창준 선배의 말이 가로막았다.
“저기, 그럼, 우리 사귀어볼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