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목이 꽉 잠겨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짧은 문장이 내가 듣는 대로의 뜻이 맞는 건지 의심스러운 지경이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 걸까? 이것은 무슨 함정일까? 대체 무엇을 위한? 창준 선배의 복수일까? 희진이에게 퇴짜 맞았기 때문에 보란 듯이 희진이의 친구인 나를 택한 걸까? 아니면 내게 퇴짜를 맞은 정호 선배의 분풀이를 대신 해주고 있는 걸까? 아니, 혹시, 저 고백이 사실이라면?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창준 선배는 정호 선배에게 나와 사귀라고 권하고는 자신은 희진이에게 고백해놓고서, 며칠이 지나지도 않아 나와 사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괴상하다는 말로는 부족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선배하고, 저하고요?”
나는 쉬운 덧셈을 손가락을 꼽아가며 검산이라도 하듯 또박또박 물었다.
“어.”
선배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는 ‘왜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말을 돌렸다.
“저기, 그럼 희진이는요?”
“희진이?”
“선배가 희진이한테 사귀자고 했다면서요.”
“아아, 그거? 그거 별거 아니야. 희진이 얼굴이 좀 반반하니까, 그냥 한번 말해본 것뿐이야. 남자들은 원래 그런 여자를 괜히 찔러보고 싶어지거든. 그리고 실은 정호가 희진이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길래, 정호 좀 놀려주려다가 그렇게 된 거야.”
나는 차라리 웃고 싶어졌다. 도대체 누가, 도대체 누구를, 도대체 어떻게 했다는 것일까. 꼬리가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선배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일부라도 사실일까, 아니면 모두 사실이기라도 한 걸까?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천치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글쎄요. 저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나는 진심으로 고백했다.
“그래, 미안해. 네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하지. 다 내 잘못이야. 그렇지만 내가 앞으로 잘할게. 정말 잘할 테니까 한 번만 기회를 줘.”
모든 게 의심스럽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와중에도 이 한마디는 내 마음을 흔들었다. 정호 선배의 고백보다 훨씬 고백다운 고백이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네’라고 대답한다면 갑자기 선배가 킬킬 웃으며 내게 손가락질을 할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정호 선배가 이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희한한 생각도 들었다. 이 상황이라면 그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나무 그늘 밑에서 한 남자가 책을 읽고 있었고 그 건너편 테이블에서는 여자 둘이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 한낮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평범함이 어쩐지 작위적으로 보였다. 특별한 가식이나 의도 없이도. 설사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해도. 창준 선배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솔직히 너도 매일매일이 지겹지? 하루나 일 년이나 다를 게 없고, 시간은 멀찍이 흘러가고, 고개를 들어봤자 막막할 뿐, 도대체 할 만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잖아. 나이만 들어가고 있잖아. 자꾸 멍해지기만 하잖아.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질 거야. 내가 약속할게. 너하고 나는 잘 어울린다는 확신이 들거든.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사실 나는 그의 얘기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하는 얘기는 무언가가 교묘하게 빠진 채 채워져 있었다. 빠져 있는 것이 하나, 둘, 혹은 여러 개인지 알 수 없었고, 어쩌면 애초부터 텅 비어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에게는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납득할 수는 있는 그 무엇이었다. 창준 선배는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이야기로 나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설사 천박하고 혹독할지언정 결코 지루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창준 선배가 부드럽게 물었다. 하지만 난 꼭 빚진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쩔쩔맸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나 이틀 정도 시간을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리저리 손익을 재어본다는 건 김빠지는 짓이었고 내 자신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에 불과했다. 멋지게 한 번에 풍덩 뛰어들던지 아니면 깨끗이 손을 털고 일어나든지, 둘 중 하나만이 가능했다. 더구나 이런 종류의 제안은 시간을 들여 생각한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고심하면 할수록 헷갈리기 쉬웠다. 차라리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마음이 기우는 쪽을 함부로 선택하는 편이 최선일 때도 있는 법이다. 일단 입을 열고 열린 내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오는지 두고 볼까 하는 찰나에,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창준 선배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느새 우리 옆에 희진이가 서 있었다. 그 당시에도 나는 그녀의 등장에 진저리 치게 놀랐지만, 지금도 그때를 돌이켜 보면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희진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니 조금만 늦게 나타났어도, 나는 창준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나의 인생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민주야, 무슨 일이야?”
희진이는 나를 향해 새된 소리로 외쳤다. 창준 선배 쪽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창준 선배는 그런 희진이를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아냐, 아무것도. 그냥 얘기 중이었어.”
얼떨결에 나는 창준 선배를 싸고 도는 것처럼 말했고, 그것이 희진이를 더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둘이 할 얘기가 뭐가 있어? 됐으니까 빨리 가자.”
희진이가 거칠게 내 팔에 손을 얹었다. 당장이라도 잡아 끌어 올릴 기세였다. 그때 창준 선배가 입을 열었다.
“내가 민주한테 사귀자고 했어.”
나는 얼른 희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라고요?”
희진이는 도저히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험상궂은 표정이 되었다. 낯빛이 순식간에 핼쑥해지고 광대뼈가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민주하고요?”
희진이는 이를 악물고 창준 선배를 노려보았다. 희진이는 분명 창준 선배가 자신에 대한 일을 사주하기 위해 나를 만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거 참 대단한 반전이 아닌가. 나는 짐짓 으쓱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여유까지 생겨서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야 희진이는 입을 열었는데, 화를 억누르느라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났다.
“선배, 지금 제정신이에요? 그날 나한테 그래놓고, 지금은 민주한테 사귀자고 했다구요?”
“아아, 그거? 그래, 그날은 내가 미안했다. 술에 많이 취해서 너한테 실수했던 것 같아. 진심은 아니었어. 사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만.”
창준 선배가 어린애처럼 비꼬았다. 희진이는 턱을 앞으로 쑥 내밀고 한 번 어깨를 들썩이더니 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민주야, 더 얘기할 것도 없어. 그만 가자.”
하지만 나는 그대로 엉거주춤 앉아있었다. 희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뭐야. 너 설마 저런 인간하고 어떻게 해보려는 건 아니겠지?”
안타깝게도 희진이는 나의 망설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희진이가 앞으로도 영영 나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걸 나는 직감했다. 이것은 단순히 창준 선배와 사귀고 안 사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 이어질 모든 이야기의 숙명이 여기에 걸려 있었다. 반면 창준 선배는 나를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 창준 선배야말로 누구보다 이야기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멀리 나를 데려가줄 터였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한 심경으로 희진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내 태도에 희진이는 더 약이 올랐다.
“그래, 알았어. 이제 보니 둘이 똑같구나. 나는 상관 안 할 테니까 둘이서 잘 해봐.”
희진이는 서슬 퍼렇게 말하고는 홱 등을 돌렸다. 그녀의 펄럭이는 검은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흐트러지는 순간, 나는 룰렛 위로 튕겨 오르는 구슬을 바라보는 심정이 되었다. 이미 내 손을 떠난 구슬이 예측할 수는 없지만 절대 틀리지 않는 물리적 법칙에 따라 숫자판을 가로지르는 걸 막연히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아니, 핑그르르 돌아가는 빨간색 구슬이 정말로 눈앞에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 그것은 고개를 돌리는 희진이의 빨간색 입술이었을까.
“선배, 역시 안 되겠어요. 죄송해요.”
결국 희진이의 인력이 창준 선배의 것보다 더 강했을까? 지금도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순간 의기양양한 표정이 희진이의 얼굴에 가득 퍼지던 것이 기억난다. 물론 창준 선배의 표정도 궁금하긴 했지만 나는 차마 선배의 얼굴은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는 희진이의 팔꿈치를 붙잡고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창준 선배에게서 한참 멀어졌을 때, 가만히 속닥거렸다.
“너무 황당한 얘기를 하니까 잠깐 얼이 빠졌었나봐.”
희진이는 완전히 만족한 것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