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 희진이와 나는 가까워졌다. 전에도 가까운 사이이긴 했지만 그때부터야말로 정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다.
그렇게 1학년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되었다. 겨울방학 중에도 (희진이가 고향인 대전에 다녀왔던 열흘을 빼고는) 희진이와 나는 최소한 일주일에 세 번 꼴로 만났다. 내가 겨울방학 내내 대형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지 않았다면 더 자주 만났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희진이의 집에서 보냈다. 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살고 있는 희진이의 집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아지트였다.
그날도 나는 마트에서 일을 끝내고 희진이네 집으로 향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희진이가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가 손에 들려 있어서 기분은 한결 가벼웠다. 그것은 매장의 빵 코너에서 팔다가 딱 하나 남은 치즈 케이크였다. 보통 팔다 남은 식품은 직원들에게 헐값에 제공되곤 했는데, 치즈 케이크에 눈독을 들인 직원들이 많아서 엄마에게 드린다는 거짓말까지 하고서야 겨우 차지할 수 있었다. 늦은 시간 피곤한 몸으로 친구에게 줄 케이크를 손에 들고 밤거리를 걸어가는 내 자신이 꽤나 다감한 사람인 것 같아 마음이 흡족했다. 막상 케이크를 받아 드는 희진이의 표정에 별다른 감흥이 없어서 김이 새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희진이가 케이크를 자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애써 기분을 북돋울 수 있었다.
케이크를 먹은 뒤 희진이와 나는 소파에 앉아 ‘거미숲’이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는 흥미로웠지만 피곤한 나머지 나는 도중에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그리고 이불을 덮어주는 어렴풋한 기척을 느끼면서 그대로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코를 찌르는 알싸한 향기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희진이가 화장대 앞에 앉아서 화장을 하고 있었다. 특별히 외출할 계획이 없는 날에도 그녀가 빼놓지 않고 화장을 한다는 사실에 나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사실 희진이는 화장에 대해 좀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나에게는 물론이고 누구에게도, 심지어 동네 슈퍼 아줌마에게도 맨얼굴을 보이는 걸 꺼려했다. 단언하지만 그녀의 맨얼굴 역시 예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말이다. 나는 가끔 “얼굴 반반한 것들이 더 유난을 떤다니까“ 하며 그녀를 놀려대곤 했는데, 어느 날인간 빈정이 상한 희진이가 정색을 하며 대꾸한 적이 있었다.
‘만약 네 몸매가 모델 뺨치게 잘 빠졌으면 다 벗고 나체로 돌아다닐래? 나한테는 화장도 마찬가지야. 맨얼굴로 돌아다니는 건 발가벗고 다니는 것과 같단 말이야.’
나는 이불 속도 따듯하고 몸도 나른하고 해서, 그대로 소파 위에 비스듬히 누워 희진이가 화장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희진이는 그런 나에게 딱 한 번 미소를 지어보였을 뿐, 내내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아예 쿠션을 턱 밑에 받치고 그녀가 화장해나가는 모습을 찬찬히 감상할 수 있었다.
나도 여자지만 여자가 화장하는 모습은 언제나 놀라웠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숙연함까지 느껴졌다. 아마도 자기 자신에게 있는 힘을 다해 몰입하는 그 강렬한 도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투영과 그토록 오랫동안 시선을 맞춘다는 건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신에 불과한지는 몰라도 좀 무섭고, 불길하고, 심지어 위험하게까지 여겨졌다. 시점은 임의적이고 주체는 가변적이며 형상이야말로 바로 모든 것의 근본이며 중심이라는 걸 거울은 직시하고 있지 않은가. 어째서인지 여자들은 그 직시를 견뎌낼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희진이가 눈썹과 입술을 그리는 것, 말 그대로 ‘그리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숨겨져 있던 얼굴이 슬금슬금 그녀의 살갗 위로 드러나면서 점점 익숙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희진이의 화장한 얼굴이 그녀의 맨얼굴보다 더 예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화장한 얼굴이야말로 진짜 희진이답다는 건 분명 사실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밝은 복숭아색 립스틱을 신중하게 입술 위에 펴 발랐다. 분홍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렌지색도 아닌, 너무 야하지도 너무 달콤하지도 않은 그 색이 내 마음에 들었다. 사실 그 립스틱은 내가 생일 선물로 희진이에게 준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휴지로 입술을 살짝 찍어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화장은 언제부터 시작한 거야?”
“뭐?”
화장하는 데 집중하느라 희진이는 내 말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화장, 언제부터 하기 시작했냐고.”
“음, 글쎄, 중학교 3학년 때던가, 고등학교 1학년 때던가.”
“그렇게 일찍? 그냥 어느 날부터 혼자 하기 시작한 거야?”
“아니, 수연이한테 배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수연이에 대해서는 여러 번에 걸쳐 희진이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소꿉친구였다. 그리고 여전히 제일 친한 친구 사이였다. 수연이가 고향인 대전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일 년에 몇 번밖에는 만나지 못했지만 2, 3일에 한 번꼴로 통화하고 있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희진이가 수연이에게 화장을 배웠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수연이라는 사람이 불쑥 실제적으로 느껴졌다. 아마도 내가 수연이라는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게 된 것도 이날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희진이가 입술 정리를 끝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수연이가 화장을 잘했었나 봐?”
“수연이네 언니가 대학생이어서 수연이도 일찌감치 화장하는 법을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내가 가르쳐달라고 했지.”
“으응, 그래?”
나는 화장을 끝낸 희진이가 늘어뜨린 긴 머리를 둥그렇고 커다란 빗으로 빗어 내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복숭아색 립스틱이 반들거리는 희진이의 입술에 눈길이 끌렸다. 금방 립스틱을 바른 입술은 지금 막 빚어낸 보들보들한 젤리같이 촉촉하고 말랑말랑해 보였다. 저 복숭아색은 희진이의 입술에 썩 잘 어울렸다. 그렇다면 다른 색은 어떨까, 회색이나 하늘색처럼 희한한 색을 발라도 예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어느새 희진이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쭈뼛이 고개를 세웠다. 그리고 내 쪽에서 먼저 아무 말이나, 예를 들면 ‘화장이 오늘 좀 진한 것 같은데’라거나 ‘왼쪽 눈썹이 좀 비뚜로 그려지지 않았어?’ 등을 말해버리려 했다. 그런데 희진이가 먼저 불쑥 입을 열었다.
“민주야, 내가 화장하는 법 가르쳐줄까?”
“화장?”
“너도 슬슬 화장할 때가 됐잖아.”
때가 되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러라고 대답했다. 희진이는 재미난 일이 생겼다는 듯 만면에 화색을 띠면서 화장품을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그리고 내게 세수를 하게 한 뒤 내 앞에 바짝 붙어 앉았다. 희진이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꼭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거울 속의 내 얼굴이 이렇게 예쁠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만약 서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 모두 똑같은 얼굴이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우리는 ‘너’와 ‘나’를 구별하기 위해 모질어져야 했을까? 적어도 정체성이니, 개인주의니, 프라이버시 같은 말들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 인간의 사전에서 ‘외로움’이란 단어도 사라지고 말았을지 나는 궁금해졌다.
내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희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빵이라도 주무르듯 두 손으로 내 볼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나는 간지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피드득 웃음이 나왔다.
“피부가 건성이구나.”
그녀는 전문가처럼 목소리를 굴리며 말했다. 그리고 스킨을 적신 솜으로 내 얼굴을 살며시 두드리며 피부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순간 알코올이 섞인 향수 냄새 때문에 코끝이 얼얼해졌지만, 그것은 곧 은은한 향기로 바뀌었다. 샴푸 냄새 같기도 하고 얼핏 수채화 물감 냄새와도 비슷한, 인위적이긴 하지만 산뜻하고 세련된 향기였다. 그리고 이것은 희진이에게서 늘 풍기는 향이기도 했다. 나는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향내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스킨하고 로션은 화장의 가장 기초가 되는 부분이니까 대충 하지 말고 꼼꼼하게 신경 써줘야 돼. 여러 번 꼭꼭 누르면서 두드려주는 거 잊지 말고. 이렇게, 이렇게..... 그다음에 에센스와 자외선 차단제도 꼭 발라주는 게 좋아. 지금이야 발라주건 말건 별로 티가 안 나지만 10년 후에는 확 차이 날걸. 그러니까 절대로 빼먹지 마....... 자, 그럼 이제 메이크업 베이스부터 시작할 거야. 나는 그린을 쓰는데, 퍼플도 있고 화이트도 있지만, 그린이 너한테도 괜찮을 거야. 자, 고개를 약간 더 들어봐. 이렇게. 응, 됐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