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진이는 풀빛이 도는 로션 같은 걸 내 얼굴에 펴 바르며 꼼꼼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설사 듣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걸 다 기억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 나는 내 얼굴에 닿는 그녀의 손동작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희진이의 손가락들은 무대 위에서 나긋나긋 발끝으로 움직이는 발레리나의 긴 다리 같았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비스듬히 시선을 돌렸다. 기울어진 희진이의 머리칼이 내 눈썹 위에서 흔들렸다. 미약하게나마 그녀의 숨도 볼에 와 닿았다. 나는 불현듯 내가 그녀를 굉장히 좋아하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치 몰래 짝사랑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 말이다. 그 날은 딱 그런 설정이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희진이는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고 정오가 가까워진 세상은 조용하기만 했다.
“자, 메이크업 베이스까지 다 발랐으면 그다음에는 파운데이션이야. 파운데이션을 하고나면 한결 피부가 매끈해 보이기는 한데 화장이 두꺼워지고 답답한 느낌이 들 수 있으니까 원한다면 생략해도 좋아. 오늘은 일단 다 해보자. 이렇게 펴 바르는 식으로 하는 거야. 잘못하면 얼룩덜룩해지니까 재빨리 펴주는 게 중요해. 자, 이렇게...... 다음은 파우더야. 눈 살짝 감아봐. 분첩에 분을 골고루 묻혀서 꾹꾹 눌러주고, 톡톡 쳐주면 돼. 이때 분가루가 옷에 묻지 않게 조심하고...... 마지막으로 밝은 색 하이라이트를 이마와 코, 눈 밑에 살짝 칠해준 다음에....... 옅게 볼 터치까지 해주면 피부 화장은 끝나는 거지....... 와, 여기까지만 해도 완전히 얼굴이 달라 보인다. 내가 했지만 진짜 잘했네. 거울 한번 볼래?”
희진이의 목소리는 명랑하기 그지없었다. 나를 화장시켜주는 일이 퍽이나 신나는 모양이었다.
“아냐, 다 끝나고 나서 볼래. 그게 더 재밌잖아.”
“그래그래, 분명히 깜짝 놀랄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자, 그다음은 말이지, 마스카라로 눈썹을 정리해주는 거야. 그냥 이렇게 빗어서 정돈만 해주어도 훨씬 낫지. 끝을 그리는 것도 좋지만, 너는 눈썹 숱이 많으니까 그냥 이렇게 반듯하게 정리만 해줄게........ 자, 됐다. 그럼 이제 아이라인을 그리는 거야. 이렇게 연필처럼 그려주면 돼. 자, 눈 감지 말고 뜨고 있어봐. 그래, 이렇게 잘 그어주고, 왼쪽 눈도....... 자, 그래, 그다음에 이걸로 속눈썹을 두세 번 찝어준 다음에........ 마스카라로 잘 말아 올려주고........ 그러고 나서 한 번 더 찝어주면....... 와, 너무 예쁘게 잘 됐는데? 거울 볼래? 참, 아냐, 제일 중요한 게 빠졌네. 입술을 칠해야지. 립스틱은 무슨 색으로 할래? 옅은 색이 나을 것 같은데.”
“그럼 복숭아색으로 할까?”
“그게 좋겠다. 그럼 먼저 입술 라인부터 그려야 돼. 너는 윗입술이 조금 얇으니까 더 위로 그리는 게 좋겠어. 그러고 나서 립스틱을 골고루 발라주는 거지. 민주야, 입술 살짝만 벌려봐.”
나는 그녀의 지시대로 입술을 살짝 벌려보았다. 그런데 입술을 벌리는 순간 나는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화장이라는 얇은 한 꺼풀의 막 뒤에서 어느새 나는 뻔뻔하고 유쾌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화면을 향해 입술을 지그시 벌리는 아름다운 여배우들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턱을 쳐들고 입술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내 자신이 헤프고 멍청한 여자처럼 느껴졌지만 그것이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희진이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을 때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입술을 열었다. 첫 느낌은 방금 바른 립스틱 탓에 좀 끈적였다. 그리고 정오의 눈부신 햇빛과 화장품 향기가 입안에 가득 차서 어지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나른하게 정신을 잃어도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바닥으로 몸을 기울였다. 도중에도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길고도 집요한 키스였다. 침이 입가로 흘러내렸지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한 덩어리의 부드러운 진흙이 된 것만 같았다. 커다란 입과 단단한 치아가 달린 진흙 덩어리였다. 내가 희진이의 목에 팔을 두르자 희진이는 내 윗도리와 브래지어를 끌어 올리고 내 맨가슴에 입술을 묻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내 가슴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머리카락 한 움큼이 내 입안으로도 엉겨 들어왔고 나는 그것을 자근자근 씹었다.
만약 어두운 밤 전기 불빛 밑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면 나는 견디지 못하고 뿌리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 안으로 쏟아져 내리는 겨울 햇빛이 너무나 따듯하고 눈이 부셔서 나는 아무런 거리낌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중간중간 황당하고 겁이 나서 정신을 차려야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멈출 기분도, 엄두도, 기운도 나지 않았다. 그저 희진이가 하는 대로 맡겨놓고 싶었고, 희진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가 내 왼쪽 젖꼭지를 말아 올리며 이를 세우는 바람에 나는 튕기듯이 몸을 비틀었다. 하마터면 신음 소리를 흘릴 뻔했지만 박자가 맞지 않아 그저 한숨만 토해냈다. 이 모든 상황과 내 자신이 경탄스럽고도 또 경악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오히려 복숭아색 립스틱이 함부로 번진 그녀의 입술을 보자 영문도 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나는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내 바지 속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잠시 후 우리는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와 나란히 누웠다. 여전히 햇빛은 눈부셨지만 우리 두 사람의 쌔근거리는 숨소리 때문에 더 이상 적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눈가에 번져 있는 눈물을 닦아내려고 무심코 손을 들어 올리다가 발작처럼 손가락을 움츠렸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풀어헤쳐진 옷을 정리했다. 희진이 쪽으로는 고개는커녕 눈동자도 돌릴 수 없었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건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나는 대충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욕실로 들어갔다. (결국 희진이가 그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영영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자마자 문부터 걸어 잠갔다. 최대한 소리를 죽여 잠금 버튼을 누르고는 그대로 문에 이마를 대고 서서 문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무엇을 엿들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잠시 후 거실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멀겋게 그걸 듣고 있었다. 한참을 우두커니 문 앞에 서 있던 나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희진이가 이상하게 여기리라는 데 생각이 미쳐서 서둘러 샤워기를 틀었다. 그리고 시끄럽게 떨어지는 물소리에 오히려 마음이 놓여서 한숨을 돌리며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소스라쳐 숨을 멈추었다. 내가 화장한 채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그라진 어깨를 잔뜩 추켜올리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뭐랄까, 고약했다.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도플갱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희진이와 똑같이 화장한 거울 속 인물은 희진이의 도플갱어일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갑자기 천지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하얀색 타일들이 앞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번들거려서 숨이 막혔다. 나는 우선 비누로 얼굴을 박박 문지르고 몇 번이나 물로 씻어냈다.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손바닥으로 닦아내고 또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비로소 익숙한 얼굴이 어정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 보며 나도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 와서 호들갑 떨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정 일이 복잡해지면 희진이와의 관계를 정리해버리면 그만이라고, 그럼 다 해결되는 거라고, 나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최악의 결과라고 해봐야 겨우 그 정도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그나마 남아 있던 불안도 잦아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서도 나는 한참이나 욕실 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들렸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부엌 쪽에서 난다는 걸 알아차렸다. 희진이가 설거지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가만히 욕실 문을 열고 문틈으로 내다보았다. 희진이는 설거지가 아니라 아침 식사를 차리고 있었다. 식탁을 행주로 훔치는 희진이의 얼굴에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거실에는 여전히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모든 게 감쪽같았다. 그 순간 나는 그대로 희진이의 집을 빠져나가고만 싶었다. 마침 가방도 현관문 옆에 놓여 있으니 챙겨 들고 뚜벅뚜벅 걸어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럼 이러쿵저러쿵 따질 것도 없이 희진이와의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잠깐 출입구 쪽을 바라보았을 뿐 순순히 식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식사를 했다. 메뉴는 오므라이스와 양배추 샐러드였다. 식사하는 내내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가방을 챙겨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희진이의 집을 정당하게 나설 수 있는 핑계거리가 있어서 감사할 뿐이었다.
“나, 그만 아르바이트 하러 갈게.”
녹음해두었던 음성처럼 괴상한 말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는 모른 척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희진이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 앞까지 따라 나왔다. 나는 일부러 신발 끈을 고쳐 매며 희진이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기를 기다렸다. 희진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희진이 쪽에서 먼저 입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몸을 일으켜 현관문을 빠져나왔다. 이제 희진이와는 끝이라는 예감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