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순진하게 (19)

by 곡도




희진이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나의 첫 경험이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뭐 굳이 따지자면 성기와 성기의 결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첫경험은 첫경험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것이 첫경험이냐 아니냐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왜 희진이와 그렇게 되었는가였다. 상대가 희진이였다는 사실과 얼떨결에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중 어느 쪽이 내 골치를 더 아프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희진이와의 섹스가 실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 ‘실수’는 ‘우연’만큼이나 모호한 단어다.) 딱히 계획했거나 원했던 건 아니었지만, 일련의 과정에 실수라고 부를 만한 점 또한 없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희진이와 나는 그저 잠시 분위기에 휩쓸렸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혹은 그렇지 않았다면 그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질문이 대답이 되고 다시 그것이 질문이 되는 끝없는 도미노가 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며 쓰러지고 일어나고 또 다시 쓰러졌다. 가장 어처구니 없었던 건 그 와중에도 희진이의 피부, 젖가슴, 얼굴, 목소리, 혀, 손가락의 감촉 같은 것들이 불쑥불쑥 생생하게 느껴졌다는 사실이다. 그 긴장, 이질감, 무례함, 무력감, 서로를 향해 버둥대는 헛된 몸뚱이들의 선명한 겹침과 마찰. 그것들이 내 피부 바로 밑에 들러붙어서 씻어도 씻겨 내려가지 않고 자꾸만 피부병처럼 근질거렸다.

내가 희진이를 다시 찾아간 건 그로부터 한 달쯤 뒤였다. 그 한 달 동안 희진이와 나는 서로 아무런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다. 사실 2주일쯤 지났을 때 전화를 해보고 싶었지만 짐짓 더 배짱을 부리다가 늦어지고 말았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희진이 쪽에서 먼저 연락을 줄 거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2주일이 지나고 3주일이 지나 한 달이 다 되도록 희진이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결국 초조해진 내가 먼저 그녀의 집을 찾아가고야 만 것이다. 그날은 3월 1일로 새 학기가 시작되기 바로 전날이었다. 만약 이대로 새 학기가 시작돼버리면 희진이와 화해하는 게 (이 상황에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힘들어질 게 뻔했다. 뿐만 아니라 소원해진 우리 관계에 대해 학교 친구들에게 일일히 설명해야 한다는 성가심도 내 등을 떠미는 데 한몫했다.

물론 희진이를 찾아가는 게 나로서도 쉽지는 않았다. 이대로 영영 희진이와 연락을 끊어버려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쉴 새 없이 오락가락했다.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좀 어색하긴 하겠지만 그건 또 그렇게 무뎌지면 그만이었다. 심지어 어쩌면 이것이 희진이와 헤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그때까지 희진이와의 관계를 끊고 싶다고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몇 번을 뒤집어 생각해보아도 이대로 흐지부지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담판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라고 해봐야 고작 세 가지뿐이라고 내 자신을 북돋았다. 결국 서로 다시는 만나지 않거나, 그날 일은 없었던 일로 하고 예전으로 돌아가거나, 뭔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거나. 그중 어떤 것이 좋은 패인지 어떤 것이 나쁜 패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떤 기대도 노력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나는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밤 9시가 조금 지났을 때 나는 희진이 집 앞에 도착했다. 이미 사흘 전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종일 시간이 비어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의 집을 찾았다. 아무래도 햇빛이 환한 낮에는 더 어색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순간이 좀 더 진지하고 밀도가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희진이의 집은 빌라 6층이었다.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걸 확인한 뒤 나는 지체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막상 굳게 닫혀있는 대문 앞에 서니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내 자신이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입장 정리도 없이 무작정 여기까지 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히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위해, 스스로의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닌가. 과연 희진이는 내게 뭐라고 할까? 자신도 영문을 모르겠다고 발뺌을 하면 어쩌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도리어 내게 물어 온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혹시 다짜고짜 화라도 낸다면? 갑자기 희진이라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깜깜해졌다. 이 남색 철 대문을 핑계로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대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때서야말로 진심으로 당황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 어떤 일에서도 나는 늘 그대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사람은 죄를 부인할 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때 진정 부끄러운 것이다. 모든 이야기는 원죄로부터 시작하며, 그것이 유죄이든 무죄이든 상관없이, 세상에 죄인이 아닌 주인공은 없다.

나는 네모난 상아색 플라스틱 초인종 버튼 위에 살며시 검지를 얹었다.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눈꺼풀까지 전해져서 가볍게 눈썹이 떨렸다. 이제 이 초인종을 누르고 나면 되돌릴 수도 핑계를 댈 수도 없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터였다. 때문에 이 벨소리는 연출적이라고 할 만큼 극적인 데가 있었다. 나는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초인종을 눌렀다. 버튼이 끝까지 닿기도 전에 벨이 울려서 나는 뜨끔했다. 그리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미리 준비해뒀어야 했다는 걸 깨달은 건 벌컥 문이 열린 직후였다. 누군지 묻지도 않고 문이 열리는 바람에 나는 당혹스럽고 불쾌했다.

“들어와.”

희진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희진이의 얼굴에 나는 더욱 기가 죽었다. 나는 태연해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침착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때 텔레비전이라도 켜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마저도 내 바람과는 달랐다. 적막한 방 안에서 시선을 둘 곳이 마땅치가 않아 나는 밖이 보이지도 않는 시커먼 유리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리에 비친 희진이는 마치 내 마음속의 음영처럼 막연하고 불분명해 보였다. 그녀는 멀뚱히 서 있는 나에게 식탁 앞에 앉으라고 권하고는 가스레인지에 물주전자를 올려놓고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깎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는?”

잠자코 사과를 깎던 그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끝났어, 며칠 전에.”

우리는 다시 입을 다물었고 그사이 주전자에서 물이 끓었다. 희진이는 찬장에서 하얗고 예쁘장한 찻잔을 꺼내더니 홍차 두 잔을 만들어 우리 앞에 놓았다. 뜨겁고 쌉싸름한 홍차 냄새가 금세 우리 사이에 가득 퍼졌다. 처음에 나는 희진이가 왜 이런 세세한 것들을 준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사과니 홍차니 하는 것들을 차근차근 차려놓는다는 게 좀 억지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홍차를 앞에 놓고 보니 희진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낮이 아닌 밤에 그녀를 찾아온 것과도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진하게 퍼지는 홍차의 향이 이 순간을 조금이나마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해주는 것 같았고, 그런 고급스러움과 세련됨이 우리에게는 필요했다.

희진이와 나는 마주 앉은 채 한동안 말 없이 홍차를 마셨다. 나는 그 뜨거운 홍차를 금새 다 마셔버렸고 희진이는 홍차가 가득 찬 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희진이가 먼저 얘기를 꺼내야 한다는 걸 우리 두 사람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기다렸다.

“그래, 어떻게 지냈어?”

마침내 희진이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지, 뭐.”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연락이 없더니, 왜 온 거야?”

그것은 참으로 싱거운 질문이었기 때문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희진이도 딱히 대답을 바라지 않았던 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

희진이는 비겁하게도 계속 질문만 하고 있었다. 나는 역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빈 홍차 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희진이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불쑥 말했다.

“사실 나 말이야, 동성애자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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