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순진하게 (20)

by 곡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희진이를 바라보았다.

“레즈비언이라고 하는 거, 있잖아.”

그리고 희진이는 처음으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그녀가 천천히 찻잔을 드는 손동작과 홍차를 넘기기 위해 수축되는 섬세한 목 근육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희진이를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생전 처음 만난 레즈비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까? 그동안 조짐이 있지 않았나? 아니, 그런데, 희진이가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무슨 상관이지?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무언가가 바뀌었나?

“그러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래?”

희진이의 질문에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홍차는 이미 한 방울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마시는 시늉만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별안간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이 모든 게 참으로 연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꼭 대사를 까먹은 배우 같았다. 어물거리며 프롬프터에 다음 대사가 뜨기를 기다리지만 프롬프터마저 작동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즉석에서 대사를 끼워 맞춰야 했다. 먼저 대사를 떠올린 쪽은 희진이었다.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이대로 서로 보지 말자고 하면 그렇게 하고, 그냥 예전처럼 친구로 돌아가도 괜찮고…….”

‘친구’라는 단어가 희진이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마치 그녀의 혀 밑에 놓여 있던 단단한 차돌 조각이 스테인리스 쟁반 위에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만 같아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마당에 명칭 따위야 무슨 상관이람. 아니, 아니다. 나는 방금 골치 아픈 부분을 교묘하게 얼버무리려 했다. 실은 명칭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를 번민 속으로 끌고 다니는 것은 실상 자체보다도 명칭이며 그것은 분명 정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과연 ‘친구’란 무엇인지, 그리고 희진이와 내가 ‘친구’인지 아닌지, 우선 이것부터 결정해야 했다.

그때 희진이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그렇지만, 사실 친구 사이라고 해서 같이 자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

나는 질겁했고 동시에 희진이의 뻔뻔함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안도하기도 했다. 이것이야말로 그날 밤 희진이가 내게 꼭 해야만 했던 말이었다. 희진이가 하지 않았다면 결국 내가 꺼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친구와 섹스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친구와는 섹스 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단지 근거 없는 결벽증의 소산에 불과했다. 물론 누군가는 친구와 섹스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애초에 섹스 하지 않는 관계가 ‘친구’라고 주장할 것이다. (보다시피 모든 건 결국 명칭의 문제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섹스 하는 사이를 ‘친구’라고 부르는 건 김치로 만든 찌개를 된장찌개라고 부르는 격이라면서, 말하자면 결혼한 여자는 결코 ‘미혼’이 아니며 ‘미혼’이라고 불려서도 안 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것이다. 좋다. 어차피 나는 ‘우정’이나 ‘친구’라는 명칭에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그 단어들을 흠뻑 적시고 있는 표백제 냄새로 인해 더 이상 골치 아프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연인도 아니면서, 또 물질적인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으면서, 인간적으로도 가까우며 지속적으로 섹스도 하는 친밀한 사이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내게 알려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내가 아는 한 국어에는 그런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새로운 명칭이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친구’라는 단어가 섹스까지도 포용하는 게 합당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텅 빈 홍차 잔만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은 결정적인 말을 내 쪽에서 먼저 하는 것이 어렵고 또 두려웠다. 고맙게도 희진이가 나의 고충을 덜어주었다.

“자고 갈래?”

그 순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는 희진이에게 우정을 느꼈다.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정말 친구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내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한 달 전 이 자리에서 보았던 짙은 화장기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두 팔에 소름이 돋아서 재빨리 옷을 벗어던졌다. 밖에서는 희진이가 기다리고 있었고 망설인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샤워기를 틀어 따듯한 물로 몸을 적시고는 선반에서 바디클린저 통을 집어 들었다. 내용물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아 통을 거꾸로 들고 손바닥 위에 탁탁 치며 흔들어대야 했는데, 그만 뚜껑이 빠지면서 짙은 노란색의 점액질 액체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끈쩍끈쩍한 노란색 액체는 내 손바닥 위에 흥건히 고이다가 움켜쥐려고 오그라든 손가락 사이로 뚝뚝 흘러내렸다. 순간 그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 나는 스펀지로 손바닥 위에 남아 있는 액체를 옮겨 바른 후 거품을 냈다. 미지근하고 느끼한 오렌지 향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재빨리 온몸을 구석구석 씻어 내려갔다. 특히 처음 희진이와 했던 날 내가 몸을 씻지 않은 채였다는 사실이 한 달 내내 내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에, 겨드랑이며 가랑이 사이도 정성껏 문질렀다. 이빨도 두 번이나 닦았다.

내가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때 희진이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무언가 굉장히 어색하다는 건 희진이 역시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희진이는 느린 동작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욕실로 들어갔다. 엉거주춤하게 서서 수건으로 목 언저리를 닦고 있던 나는 욕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나는 냉정해지려고 애쓰며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었다. 하지만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빗이 자꾸만 헛돌아서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아예 빗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매만지던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과 또 다시 마주쳤다. 나는 이번에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어딘지 모르게 진력이 난 표정이었다. 심드렁하고 무신경한데다가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일인데도 왜 아무 셀레임도 없는 것일까.

아니, 이래선 안 되지. 나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바짝 뒤로 쓸어 넘겼다. 이것은 경솔하고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의 흔쾌한 방종이 아닌가. 나는 그에 걸맞게 멍청하고 유쾌해져야 마땅하지 않은가. 나는 젊고 무엇이든 할 권리가 있으며 그것을 증명할 의무가 있었다. 나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희진이의 로션을 손에 덜어 얼굴에 듬뿍 발랐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립스틱을 찾기 위해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언젠가 희진이의 분홍색 립스틱을 화장대 서랍 속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랍 속에는 다른 색깔의 립스틱만 몇 개 있을 뿐 분홍색 립스틱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머지 서랍들과 희진이의 핸드백, 화장품을 모아둔 상자까지 온통 뒤지기 시작했다. 그냥 다른 립스틱을 발라도 상관없었지만 나는 그 립스틱이 아니면 안 된다는 괴상한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결국 나는 화장대 맨 아래 서랍 구석에서 거의 닳아빠진 분홍색 립스틱을 찾아냈다. 그것을 입술에 바르고 휴지로 찍어내고는 다시 바르고 다시 찍어내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결과적으로 처음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까칠한 느낌은 조금 가신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한 후 침대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런 저런 자세를 취해보아도 거북하기만 했다. 이렇게 침대에서 희진이를 기다리고 있는 내 자신이 남사스럽고 가소로웠다. 태평하게 자는 척이라도 해버릴까.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보이겠지. 코미디 프로라도 틀어놓고 깔깔 웃어볼까. 그건 또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아둔해 보일 거야.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욕실에서 들려오던 샤워기 물소리가 멈추었다. 결국 욕실 문이 열렸을 때 나는 리모컨을 손에 쥐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대고 있었다. 희진이는 하늘색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욕실에서 나왔다. 하얗고 서늘한 가슴팍을 드러낸 채 젖은 검은 머리를 그렁그렁 늘어뜨린 그녀는 분명 매력적이었다. 희진이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을 남자 선배들과 동기들 몇몇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이런 상황에 처한 걸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오히려 자괴감에 빠져야 하는 걸까.

희진이는 화장대 앞에 앉아 얼굴과 팔에 화장품 두어 가지를 발랐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바로 전등불을 껐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방 안에는 텔레비전 화면의 건조하고 창백한 불빛만이 뽀얗게 흔들렸다. 나는 놀란 나머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뻣뻣한 태도에 어리둥절했는지, 아니면 이해했기 때문인지, 희진이는 잠자코 내 등 뒤에 앉아 있었다. 어쩌면 잠깐 동안 희진이도 나와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텔레비전에서는 온난화에 대한 환경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재밌어?”

마침내 희진이의 목소리가 귓불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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