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순진하게 (21)

by 곡도





“글쎄.”

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텔레비전 시청에 정말 몰두해 있기라도 한 사람처럼 건성으로 대꾸했다. 될 수 있는 한 덤덤히 말하려던 것이 필요 이상으로 냉정하게 들렸다. 등 뒤에서 슬쩍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그건 단순히 내 자격지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이런 내 태도가 도통 마땅치를 않았다. 나도 영화 속의 멋진 외국 여자들처럼 적극적으로 희진이를 상대하고 싶었다. 이런 것쯤은 식후에 마시는 맥주에 불과하다는 듯 유쾌하고 거리낌 없이 굴고 싶었다. 대체 섹스가 뭐 대수인가? 살빼기 위해 섹스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수면제 대신에 섹스를 한다는 사람도 있고, 30분 남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섹스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그냥 몸이 근질근질해서 섹스를 하기도 한다. 섹스란 그냥 그런 것이다. 서로 공유하는 자위 같은 것. 거기에는 긴장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내게는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휩쓸리듯이 얼떨결에 치러버렸던 그날을 ‘첫날밤’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오늘이 내 공식적인 첫날밤인 셈이었다. 하지만 희진이에게는 물론 이게 처음은 아닐 테지. 이게 몇 번째 경험일까? 아니, 내가 몇 번째 상대일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더욱 창피해졌다.

그때 희진이가 내 손에 들려 있던 리모컨을 덥석 잡더니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빛이 오그라들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둠이 턱 밑까지 조여 왔다. 나는 덜컥 숨을 죽이고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버림받은 어린애라도 된 기분이었다. 가식적일 뿐만 아니라 교활하고, 때론 일부러 뻔한 표정도 해보지만 실은 나는 아직도 얼떨떨한 어린애에 불과했다. 이 밤이 지나면 나도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대체 어른이 되는 다른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두터운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내 어깨에 닿았다. 옷을 벗기려는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팔을 들어 올려 윗도리를 벗었다. 희진이는 내 브래지어까지 벗겨버리고는 나를 돌려 앉혔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이것은 나의 영원한 숙제다. 이런 혹은 저런 순간에 과연 어떤 표정을 짓는 게 가장 적당하단 말인가?)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다가오는 희진이의 숨결을 느끼고는 차라리 안심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희진이는 자신의 입술을 내 입술에 맞대고 문지르더니 슬쩍 무는 식으로 내 입술을 열었다. 두 혀가 부딪히는 소리가 입속을 통해서 귓가를 울렸다. 희진이의 손이 내 목과 귀 뒤쪽을 어루만지다가 가슴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곧이어 내 바지와 팬티마저 모두 벗겨버렸다. 그녀의 행위는 첫날에 비해 한결 차분해진 듯싶었다. 말하자면 순서를 차례차례 밟아나가는 느낌이었다. 나 역시 일종의 공모의 감정이, 혹은 겸손한 연대의 감정이 마음 속에서 차올랐다. 계약이라고 말하면 너무 거창하고 극적인 표현이 되겠지만, 이날 희진이와의 섹스는 다분히 의례적인 데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민주야, 나도 만져줘.”

그렇기 때문에 희진이의 이 말도 색정적이기보다는 성실하고 당연한 요구로 느껴졌다. 특히 첫날의 섹스에서 나는 거의 무력하게 희진이에게 매달리기만 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나는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로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우선 복슬거리는 털이 손끝에 닿았을 때는 이질감에 흠칫 놀라기도 했지만, 곧 털 속에 있는 틈새로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희진이의 몸이 짧게 경련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좀 더 손가락 끝에 힘을 주고 둥글게 원을 그렸다. 희진이가 고개를 웅크리더니 앓는 소리를 냈다. 이것은 (결코 적절하거나 정확한 표현은 아니겠지만) 꽤나 재미가 있었다. 그녀가 내 손끝의 작은 움직임에도 확실히 느끼고 반응한다는 사실이 만족스럽다고 해야 할까, 기껍다고 해야 할까. 역시 굳이 표현을 찾자면 ‘재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손끝으로 희진이의 성기를 자극하면 할수록 내 것을 문지르는 희진이의 손 역시 빨라졌다. 이를 악물고 참고 있던 나도 결국은 신음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누구의 숨소리인지, 이것이 누구의 손가락인지도 모르게 우리는 둘 다 얼굴을 젖히고, 지분거리고, 헉헉거리고, 꿈틀거렸다. 그리고 아랫배가 뜨거워지면서 찌르듯이 아파오더니 내 쪽에서 먼저 느낌이 왔다. 나는 몸을 크게 부르르 떨고는 희진이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늘어져버렸다. 하지만 희진이는 내 다리에 배를 더 밀착시키며 계속 몸을 움직여댔다. 나는 내 위에서 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 채 혼자 앞뒤로 몸을 흔들면서 가쁜 숨을 토해내는 희진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간절할 정도로 사랑스럽고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괴상해 보였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황이었을까? 욕망이었을까? 우스움이었을까? 씁쓸함이었을까? 두려움이었을까? 쾌락이었을까? 어쨌거나 그것은 견딜 수 없는 무엇이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조차 가지 못하고 오히려 더 깊이 처박혀야 하는 무엇.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희진이의 다리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사타구니를 핥아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보다 나 자신에게 경악할 만한 행동이었지만 그런 걸 따질 경황이 없었다. 축축하게 젖은 털이 혀끝에 몇 올씩 달라붙고 어쩐지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들도 아무 상관없었다. 그저 나는 내 자신의 전적인 능동성과 효율성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다. 희진이를 압도하는 내 자신에게 나는 압도되었다. 희진이는 가랑이를 쫙 벌린 채 그런 나를 삼킬 듯이 끌어당겼다. 그것은 충격적인 장면이었고, 눈물이 날 것 같았고, 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결국 한없이 나를 기쁘게 했다.

그 날부터 희진이와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잠자리를 가졌다. 완전히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희진이와의 섹스는 점점 마땅하고 익숙한 일상이 되어갔다. 내 처녀막은 대략 여섯 번째인가 일곱 번째의 잠자리에서 터졌다고 생각된다. 작은 출혈이 있었는데, 희진이가 휴지로 그것을 닦아주었다. 우리는 둘 다 그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 얼마 동안은 희진이가 주로 잠자리를 주도했다. 하지만 같은 여자 사이에 숙맥처럼 언제나 이끌리는 쪽이라는 건 실망스럽고 창피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도 물러서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우리는 한참을 엎치락뒤치락할 때가 많았다. 그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소모적인 전희였지만, 그런 가변적이고 불안정하며 끊임없이 전복되는 주도권 행사야말로 동성 섹스의 묘미일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남녀 사이의 섹스에서라면 성별의 차이, 힘의 차이, 성기의 구조 차이 때문에 적당히 용인되고 넘어갔을 긴장과 갈등이, 옷을 모두 벗고 나면 실상 나와 별다를 것이 없는 상대와의 섹스에서는 한층 예민해지고 또 격렬해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동성끼리의 섹스야말로 이성끼리의 섹스보다 훨씬 더 ‘섹스의 원형’에 충실한지도 모른다. 태초의 남자와 여자도 서로에게서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더 많이 보았을 테니까.

네다섯 달쯤 지나자 나는 잠자리에서 제법 희진이를 주도하게끔 되었고 가끔은 내 쪽에서 열을 내어 희진이를 휘두를 때도 있었다. 한동안 나는 그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한 사람을 내 손바닥 안에서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는 소유욕이라든지, 이 모든 상황을 내가 전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자신감이라든지, 상대방에게 이런저런 짓을 해도 모두 용인된다는 놀라운 안심 같은 것들에 나는 도취되었다. 그리고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주눅이 들어 있었는지, 얼마나 눈치를 보고 있었는지, 얼마나 안달하고 있었는지 깨닫기도 했다. 단순한 쾌락 이상의 어떤 감동이 내 행위 전체를 지지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중에야 깨닫게 된 일이지만, 나는 섹스에서 주도하는 쪽보다는 주도당하는 쪽이 더 좋았다. 능동의 의도성보다는 수동의 의외성이 훨씬 더 나를 흥분시켰다. 말하자며 나는 잠자리에서도 주눅이 들고, 눈치를 보고, 안달하는 게 좋았다. 그리고 어쩌면 섹스의 진정한 주체는 주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주도당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모순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니, 주도하는 사람이 ‘섹스를 하는 사람’이라면 주도되는 사람은 섹스 그 자체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그에 비해 희진이가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두 번 희진이를 슬쩍 떠본 적이 있었지만 단지 아리송한 대답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하긴, 어쩌면 모르는 편이 더 나았다. 그럼으로써 서로 은근히 눈치를 보게 되고 그러다가 결국은 눈치를 채게 되더라도 말이다. 그녀는 나와의 섹스에 만족하고 있을까, 어떤 역할이나 체위를 더 좋아할까, 그녀의 오르가슴은 모두 진짜일까 등등이 나에게는 최대의 미스터리였지만, 사실 이 의문들은 모두 내가 차후에 지어낸 것에 불과했다. 막상 섹스 중에는 나는 그 무엇도 궁금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서로 얽히고 설키는 팔과 다리, 흔들리고 부딪히는 엉덩이, 젖히는 턱의 뾰족한 선, 출렁이는 머리카락, 혀에 감기는 유두의 돌기, 찡그리는 이마의 주름, 목에 닿는 이빨 등등, 그 순간의 우리는 펄떡거릴 정도로 극심한 실제였다. 손에 쥐면 손 하나 가득 쥐어지는 현실이었다. 감추어진 것도 감추어질 곳도 없었다.

가끔 그녀의 반응이 기대보다 신통치 않을 때는 내게 남자의 성기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괜한 공상을 해보기도 했다. 가랑이 사이에서 길게 곧추서는 살덩어리가 기형처럼 느껴져서 소름 끼치기는 했지만 여자와 섹스 할 때만큼은 분명 쓸모가 있을 것이다. 사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돌출된 성기를 찔러 넣는다는 건 흥분되고 짜릿한 일임이 분명했다. 찌른다, 쏜다, 분출한다, 이런 말은 발음부터가 어딘지 호전적이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도 나는 남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가랑이 사이에 덜렁거리는 성기를, 그것도 모래주머니 같은 고환 두 개까지 세트로 달고 다니는 건 분명 끔찍한 일이었다. 다만 가능하다면 그것을 그저 가끔씩 꺼내 쓸 수 있는 부록쯤으로 상비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타구니에 벨트로 고정시켜서 사용하는 딜도를 인터넷에서 구입했다. 희진이도 기꺼이 응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딜도 벨트를 가지고 남녀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체위를 번갈아 시도하며 한동안 재미있게 지냈다. 딜도를 차고 섹스를 할 때면 내가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심지어 사람도 생물체도 아닌 이상한 불임의 도구가 된 것만 같아 섹스 도중에 소름이 돋은 채 날카롭게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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