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순진하게 (22)

by 곡도




2학년 여름방학이 가까워진 무렵이었다. 나는 한밤중에 집을 빠져나와 희진이의 자취방으로 갔다. 6월에 찾아온 이른 열대야 탓에 잠이 오지 않았고, 또 더워진 열기에 갑자기 섹스가 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희진이 집에는 작지만 성능이 좋은 벽걸이 에어컨이 있어서 더위도 식히고 섹스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희진이는 막 씻고 자려던 참이었는지 하얀색 헤어밴드로 머리를 뒤로 넘기고 거품이 가득한 칫솔을 입에 물고 있었다. 실내는 에어컨을 틀어놓아서 시원했다. 우리는 곧바로 침대로 올라가 옷을 벗었고, 희진이는 딜도가 달려 있는 벨트를 내 사타구니에 매는 걸 도와주었다. 서로 아무 대화 없이도 모든 게 신속하고 자연스러웠다. 딜도를 고정시키기 위해 희진이가 상체를 수그리는 순간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가 내 눈을 시리게 했다. 우리가 섹스를 할 때 불을 끄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가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일부러 불을 끌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환한 불빛 아래서 섹스를 하는 게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 창피함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허리띠를 매자 곧추선 딜도가 아랫배 밑에서 덜렁거렸다. 나는 조임쇠를 당겨 딜도를 내 몸에 바짝 붙였다. 사타구니가 단단하게 꽉 차올랐다. 이때의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나는 원한다면 땅을 박차고 올라 하늘이라도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은 곤두박질 쳐서 바닥에 부딪혀도 전혀 다칠 것 같지가 않았다. 내 몸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일종의 광물질로 바뀐 듯 했고, 이 순간만큼은 몸도 영혼도 결코 상처받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희진이를 일으켜 세웠다.

“한번 서서 해볼래?”

포르노 동영상을 볼 때마다 서서 하는 기분이 궁금했던 참이었다. 처음에 어리둥절해하던 희진이는 내 허리 밑에 달린 딜도를 난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좀 머뭇거리는 눈치였지만 곧 순순히 뒤로 물러나 벽에 등을 기댔다. 마주 서면 그녀의 키가 나보다 5-6센티 가량 컸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나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발꿈치를 들어 그녀의 입에 키스했다. 그리고 어깨와 가슴에 키스를 퍼부으면서 그녀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딜도가 그녀의 허벅지에 닿자 그녀는 웃음을 터트리며 내 어깨에 턱을 기대었다. 그 바람에 딜도가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고 나는 정말로 내 성기가 발기라도 된 것처럼 온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희진이에게 몸을 밀착시키고 무릎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벌렸다.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어야 했기 때문에 희진이의 무릎이 바르르 떨렸다. 흥분한 내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며 막 딜도를 밀어 올리려는데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받지 마.”

나는 조급해져서 서둘러 말했다. 희진이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떤 경우에든 핸드폰을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영화관에서조차 진동으로 해놓고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다가 전화가 오면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을 정도였고, 목욕할 때도 빼놓지 않고 욕실로 가지고 들어가곤 했다. 심지어 섹스 중에도 결코 핸드폰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받아야 하는 중요한 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누군가가 자신에게 건 전화를 받지 못한다는 게, 그래서 사소할지언정 어떤 용건을 놓친다는 게 도무지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잠깐, 민주야. 잠깐만.”

“받지 마. 어차피 별 전화도 아닐 거면서. 그냥 내버려 둬.”

“그래도 전화가 왔는데 받아야지.”

“나중에 다시 걸겠지. 나중에 네가 다시 걸든지.”

“잠깐만. 빨리 끊을게.”

그녀는 결국 내 손을 뿌리치며 전화를 받으러 달려갔다. 나는 침대로 가서 뒤로 벌렁 누워버렸다. 고개를 들자 딜도가 꼿꼿이 선 채로 공중에서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 꼴이 무식하고 징그러워서 딜도를 풀어 침대 밑으로 던져버리고는 곁눈질로 희진이를 바라보았다. 희진이는 알몸으로 화장대 앞에 앉아 한 손으로는 전화기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눈썹을 매만지며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쪽 고른 등과 동그란 엉덩이가 정면으로 보였다. 그 등허리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척추 뼈의 오돌오돌한 모양새가 너무나 투명하고 섬세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희진이는 거울 가까이로 몸을 더 기울였다. 거울 속에서 그녀의 하얀 뺨과 보송보송한 젖가슴이 부드럽게 빛났다. 자기 자신에게 가까이 눈을 맞추고 있는 희진이의 뒷모습과 앞모습을 동시에 훑어보면서 나는 아름다운 두 명의 희진이가 섹스를 하는 상상을 재빠르게 해보았다.

“수연아, 어, 그래. 지금 집이야. 응, 여기도 덥지, 뭐. 아냐, 그냥 있었어, 응.”

수연이었다. 수연이를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나는 이미 그녀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마치 늘 주변을 맴도는 화장품 향기처럼, 그녀는 희진이의 생활 속에 그리고 희진이와 관계된 내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얼마 전 희진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들을 구경하다가 수연이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수연이는 조금 처진 눈매에 맵시가 얌전하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편안한 분위기의 여자였다. 그리 가볍지도 그렇다고 심각해 보이지도 않아서 부담 없이 무난한 사람 같았다. 그러나 이런 두리뭉실한 묘사 외에는 딱히 인상적인 부분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희진이의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는 수연이 사진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희진이와 육체관계를 맺은 후부터 누구든 여자의 외모는 희진이와 비교해보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에 수연이가 더욱 눈에 차지 않았다.

수연이는 대전에 있는 대학에서 아동미술교육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밖에 미술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아버지는 중소기업 회사원에 어머니는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공무원이고,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언니가 한 명 있고, 작은 도자기 소품들을 좋아하고, 뮤지컬에 관심이 있으며, 집 안에 머무는 걸 좋아하고, 성격은 차분하고 조용한 편이지만 고집이 세고, 가끔 어린애처럼 엉뚱한 소리를 할 때가 있다는 것, 대충 이 정도가 내가 수연이에 대해 알고 있는 점들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수연이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대충 어떤 사람인지 떠올려보기에 부족함이 없어서, 희진이가 수연이 얘기를 할 때면 짐짓 맞장구를 쳐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원래부터 셋이 친구였던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는데,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이미 세 사람은 친구나 다름이 없었다.

가끔씩 희진이가 일부러 내 앞에서 수연이를 치켜세운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때마다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딱히 불쾌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친한 친구에게 자신의 또 다른 친한 친구를 더 멋있게, 더 다정하게 설명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보다는 수연이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는지가 더 신경이 쓰였다. 과연 두 사람은 나에 관해 어떤 대화를 주고받을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두 사람의 전화 내용을 엿듣게 되었다.

“그래? 아냐, 그런 건. 응. 저번에 그 얘기? 아, 그렇긴 하지. 아냐, 그렇진 않아. 그렇다니까. 그건 잘 해결됐어.”

해결이라니, 무슨 일일까.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걸로 봐서 내가 영 모르는 사정인 모양이었다.

“그래. 응. 그건 그렇지만. 정말? 그래? 그럼 좋고. 응, 알았어. 그런데…….”

희진이는 우리가 섹스 중이었다는 걸 까맣게 잊은 듯했다. 기분이 발끝까지 냉랭해져서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책들 중에 아무거나 펼쳐 들었다. 하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금세 안구에 열기가 차올랐다. 나는 읽지도 않은 페이지를 기계적으로 넘겨댔다.

오해를 막기 위해 분명히 집고 넘어가자면 이건 질투 같은 게 아니었다. 내가 희진이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돼야 한다거나 혹은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부터 어떤 감정을 보증 삼아 육체관계를 맺었던 것도 아니고, 아무 감정 없이도 그녀와의 섹스는 충분히 즐거웠으니까. 말하자면 희진이가 내심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나는 아무런 유감도 없었다. 다만 내가 희진이에게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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