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 언제? 다음 주? 잘됐네. 그럼, 당연하지. 아냐,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알아볼게. 일단 합정역까지 와. 거기서 전화하면 내가 나갈 테니까. 어. 응. 그래, 알았어. 그럼 그때 보자. 응. 으음. 알았어. 너도 잘 자.”
마침내 희진이가 전화를 끊었지만 나는 모른 척 계속 책을 뒤적였다. 희진이는 내게 다가와 침대 옆에 쭈그리고 앉더니 내가 보고 있는 책을 어깨너머로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수연이가 다음 주에 볼일이 있어서 서울에 올라온대.”
“그래?”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자도 읽지 않은) 책장을 넘기며 대답했다. 희진이는 내 등에 슬그머니 손을 올려놓고 등골을 따라 간질이듯이 쓰다듬기 시작했다. 나는 좀 더 화난 척을 해보려고 했지만 희진이의 손이 점점 더 밑으로 내려와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고 우리는 섹스를 했다. 하지만 이미 김이 샌 뒤였기 때문에 그저 서로 손만 이용해서 간단하게 끝마쳤다.
“그런데, 저, 그 수연이라는 친구 말이야.”
에어컨 바람이 선뜩해서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리면서 나는 물었다.
“어.”
희진이는 나른하게 대답했다.
“다음 주 언제 온데?”
“금요일.”
“금요일? 그날 왔다가 바로 가는 거야?”
“아냐. 이왕 온 거 볼일도 보고 쇼핑도 좀 하다가 일요일에 내려갈 건가 봐.”
“그럼 다음 주에는 나도 수연이를 보게 될지 모르겠네.”
“글쎄. 왜?”
“아니, 그냥. 그러니까, 둘이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지?”
“어, 그렇지. 벌써 10년이 넘었네.”
어쩐지 희진이가 내게 ‘10년’을 강조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수연이에게 밀릴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뭐라 해도 나는 희진이가 레즈비언이라는 비밀을 알고 있었고, 또 그 비밀의 증인이자 당사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섹스 후에 함께 알몸으로 누워 수연이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가히 10년의 세월이 무색하다고 나는 자신했다.
“그 친구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뭐?”
“네가 동성애자인 거 말이야. 그런 거 이해해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나는 희진이를 심란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슬쩍 찔러보았다. (나는 그 전에는 한 번도 ‘동성애’라는 단어를 희진이 앞에서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아, 그건, 수연이도 알고 있는데.”
“그래?”
나는 나도 모르게 빽 소리치며 상체를 들썩였다.
“아니, 어떻게 안 건데?”
“그게, 그냥.”
“그러니까 어떻게?”
“흠, 사실은, 내가 수연이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었거든.”
희진이는 굳이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이 순순히 얘기했다.
“왜 그렇게 말했는데?”
참으로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그거야, 좋아했으니까.”
나는 그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머릿속에 그려온 수연이란 사람이 처음부터 완전히 잘못되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수연이에 대한 소소한 정보들을 듣기 전에 희진이가 그녀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았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수연이에 대한 올바른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감쪽같이 속아온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수연이는 누구란 말인가?
“어릴 때 얘기야. 고등학교 때.”
“수연이는 뭐라고 대답했어?”
“그냥, 대충, 별말 없이, 넘어갔어.”
“대충?”
“그냥 흐지부지됐어. 별일 아니었어. 둘 다 어렸으니까.”
희진이는 그만 자자며 전등을 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잠들 수가 없었다. 심란하다는 건 분명 이런 기분을 꼭 집어서 하는 말일 것이다. 촘촘한 그물에도 걸리지 않을 만큼 잘게 바스러진 생각들이 머릿속을 뿌옇게 어지럽혔다. 흡사 희진이가, 혹은 수연이가, 아니, 둘이 함께, 내 손등을 발로 밟고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라리 화가 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나는 곁눈질로 슬쩍 희진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쪽으로 돌아 누운 채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섹스 할 때 빼고는 언제나, 잠들었을 때조차, 빈틈없이 단정한 얼굴이었다. 나는 슬쩍 이불을 들추어 그녀의 알몸을 훔쳐보았다. 수없이 보아온 몸이었지만 여자의 몸은 여자에게도, 사람의 몸은 사람에게도 언제나 낯설었다.
일주일 뒤 금요일, 희진이는 수연이를 만나러 가기 위해 강의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따라나서고 싶었지만 적당한 구실이 없어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수연이를 만날 기회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거짓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희진이의 집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콧속을 간질이는 재채기처럼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었다. 수연이가 누군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온종일 궁리한 끝에 나는 겨우 핑계거리 하나를 끼워 맞췄다. 일주일 전에 희진이에게 빌려 주었던 책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책이 실은 친구 건데 (물론 내 거였다) 그 친구로부터 책을 돌려달라는 연락이 와서 가지러 왔다’는 구실이었다. 혹여 그 친구가 누구냐는 질문이 나올까봐 친구 이름도 정해놓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찌감치 희진이의 집을 찾아갔다. 핑계가 아무리 그럴듯하든 간에 친구와 함께 있는 희진이를 불시에 방문하는 건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전화부터 걸었다간 나중에 직접 가져다준다느니, 지금 오는 건 좀 곤란하다느니 등의 얘기가 나올까 봐 그대로 강행하기로 했다. 나는 대문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으며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신경 안 쓴 듯 신경을 쓰느라 한 시간가량이나 거울 앞에 붙어 있다가 온 참이었다. 옅게 화장도 했는데, 화장은 희진이에게 배운 이후부터 죽 해오고 있었다. 화장은 옷을 차려 입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희진이의 말을 슬슬 실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귀밑머리를 가지런히 쓸어 넘긴 후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며 희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 아침부터 웬일이야?”
“저기, 저번에 네가 빌려 간 책 있잖아, 그 책이 원래 내 게 아니라 내 친구 거거든. 근데, 아침에 전화가 왔는데, 걔가 지금 바로 그 책이 필요하다고 해서. 미안한데 지금 가져가도 될까?”
나는 꼼꼼하게 외워둔 대사를 숨도 쉬지 않고 늘어놓으며 슬쩍 집 안을 기웃거렸다.
“그래? 아직 다 안 읽었는데, 할 수 없지. 알았어.”
“저, 친구하고 있는데 아침부터 미안해.”
“친구? 아, 수연이? 아냐, 나 혼자야.”
“그래?”
“수연이는 어젯밤에 갔어.”
희진이는 책을 찾기 위해 책장을 뒤적거렸다.
“왜? 저, 내일까지 있는다더니?”
“그러기로 했었는데 다른 볼일이 생겼다면서 새벽 차 타고 내려갔어.”
나는 그만 기운이 쏙 빠졌다. 고심했던 모든 것들이 단번에 우스꽝스러워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여전히 나는 수연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것이 그녀를 중요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책 여기 있다. 그런데 아침은 먹었어? 밥 안 먹었으면 먹고 가.”
“아냐, 가봐야 돼.”
“그럼, 이따가 저녁에 올래?”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오후에 부모님하고 외삼촌 집에 가기로 했거든.”
거짓말이었다. 나는 나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잔뜩 골이 나서 아무렇게나 거짓말을 지껄여댔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날 밤에 희진이를 찾아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