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이젤

빌헬름 함메르쇠이

by 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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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ist's Easel 예술가의 이젤 /

Vilhelm Hammershoi 빌헬름 함메르쇠이 (1910)






도구는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 내면과 외면,


삶과 죽음의 이중적인 스펙트럼으로 어지러운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동시에 거스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저 존재의 표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름진 부유물일 뿐.


그런데 돌연


(어쩌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젖어들었나?)


도구가 무거워진다.


그리고 존재의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밑으로


밑으로


밑으로


존재의 부산물이 영원히 쌓여있는 바닥으로


근본도 목적도 없는 자기 자신에게로


무심코 고개를 돌린 우리에게로


닿을 때까지.


그때 존재의 바다가 거꾸로 뒤집어지면서


하나의 사물-이젤이 솟구쳐 오른다.


이제


물감이 물감을 그리는 이 세계는


이젤 위에 놓인 저 뒤집어진 그림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연못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나는 풍경화 혹은


나무 탁자 위에 하얀색 사기그릇이 놓여 있는 정물화 혹은


회색빛 그림자 너머 창가에 이젤이 자리하는 실내화


하지만 이제는 먼 추억을 상기시키는 기념품일 뿐.


이젤은 그림을 위해서가 아니라, 화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있다, 스스로.


지금 여기에.


우리는


(도구도 사물도 아닌 우리는)


숨을 죽인 채


이젤에게서 '이젤'이라는 이름을 남몰래 닦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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