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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Sep 24. 2023

[연극] The Father





연극 :  The Father

공연장소 :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공연기간 : 2023년 9월 19일 ~ 2023년 10월 1일

관람시간 : 2023년 9월 23일 오후 4시




    처음에 선뜻 이 연극을 예매하기가 망설여졌는데, 신파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치매', 신파로 흐르기 딱 좋은 주제가 아닌가. 아니, 신파로 흐르지 않기가 더 어렵지 않겠나. 그러나 프랑스에서  오리지널 공연이 각종 상을 받았으며 심지어 '21세기 최고의 마스터피스'라는 찬사까지 받았다고 하니 귀가 얇고 권위 앞에 약한 나는 용기를 내어 예매를 감행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연극은 신파가 아니다. 제목을 '아버지'가 아닌 'The Father'로 한 것도 신파와 거리를 두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물론 아예 신파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략 20-30% 정도는 신파라고 봐야겠지만, 그 정도는 주제의 특성상 지극히 양호한 편이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일단 이 연극에 후한 점수를 줘야 할 것이다. 이 연극은 완전하게 폐쇄되어 버린 치매 환자의 세상에서부터 곧바로 시작한다. 치매 판정에 따른 충격이나 비애, 갈등 같은 인간적인 드라마 같은 건 애초에 훌쩍 건너뛴 이 무대는 이미 완성된 하나의 세계이다. 치매 환자의 작디작은 지옥.

    치매에 걸린 노인 앙드레는 이미 혼자서는 생활하지 못할 만큼 병세가 위중한데도 자신의 아파트를 떠나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그 '아파트'라는 것은 물리적인 실제 공간을 말하는 건 아니다. '아파트'는 그가 자신의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자아의 공간이다. 그가 몇 십 년을 살아온 '아파트'는  자신의 모든 삶과 기억이 새겨져 있는 장소이며 자기 자신만큼이나 익숙하고 실존적인 곳이다. 그런데 그곳을 외부인들, 침입자들, 교란자들이 계속해서 침범하기 시작한다. 딸 안나, 간병인 로라, 안나의 남자친구 삐에르, 간호사. 그들은 그의 허락도 없이 쳐들어와 (언제나 문을 열어주는 건 앙드레 자신이 아니다) 서로 얼굴과 이름을 바꾸어 가면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믿기 힘든 진실을 말하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같은 말의 어조를 쉴 새 없이 뒤바꾼다. 그는 의심스러운 그들을 고발하고, 그들과 투쟁하고, 또 그들에게 협력도 해본지만 일이 해결되기는커녕 점점 더 뒤죽박죽이 되어갈 뿐이다. 어떻게 세계가 이토록 부조리하고 부당할 수 있단 말인가. 이토록 부조리하고 부당한 데 어떻게 여전히 세계란 말인가.  'To be or not to be'라는 대사가 여기서도 어울릴 법 하지만, 문제는 그는 햄릿이 아니다. 왕자 햄릿처럼 고뇌하는 인물이 아니다. '아파트'도 그런 거창하게 비극적인 지옥이 아니다. 여기에는 밝혀야 할 음모도, 감행해야 할 반란도, 죽여야 할 상대도 없다. 그가 느끼는 고통은 '고뇌'가 아니라 단지 '어리둥절'일뿐이다. 그는 그저 이유도 없이 때리면 맞아야 하는 나약하고 멍청한 어린애다. '아파트'는 그저 일방적으로 견뎌야 하는, 이해하려 해도 소용이 없는, 의지가 없는, 희망이 없는, 내일이 없는, 이야기가 없는, 엔딩이 없는, 관객이 없는, 텅 빈 지옥이다.          

      그러나 나는 이 연극이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이 연극은 '애매모호', '우유부단',  '무미건조'하다. 이 연극은 마치 실제로 치매에 걸린 사람들을 혹시나 상처입힐까봐 두려워서 한껏 소심해진 듯한 느낌이다. 작품이 꼭 자극적일 필요는 없지만 인상적이지 않다는 건 문제가 있다. 나는 이  희곡이 언제 쓰인 것인지 확인해 보았다. 작가가 1979년생이라고 하니 요즘의 희곡이다. 이상한 일이다. 만약 이 희곡이 1879년생 작가가 쓴 것이라면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이 1979년생은 어디 오지에서 살다가 나왔다는 말인가? 이미 우리는 치매라든지, 망각과 기억 왜곡이라든지, 망상 인격이라든지, 시공간의 교란과 환상이라든지, 뭐 하여간 이런 식의 정신분석학적 혹은 신경학적 설정에 너무나 익숙하며, 이미 이 계열의 훌륭한 작품들을 소설, 연극, 특히 영화를 통해 다수 접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안일하고 한가한 접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옥을 만들려고 했으면 좀 더 치열하게 만들었어야지. 관객이 보다가 자살하고 싶을 만큼, 관객들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이 불쌍한 치매 노인을 죽여주고 싶을 만큼.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끔찍한 지옥을 무대 위에 올린다고 해도 실제 지옥보다는 한 없이 너그러울 테니까.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후반부에 앙드레가 뜬금없이 엄마를 찾는 설정이었다. 혹시 이 연극을 보고 눈물이 터진 관객이 있다면 분명 치매에 걸린 노인이 엄마를 찾던 이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연극 때문에 흘린 눈물이 아니다. 그냥 감상적인 인간으로써 조건 반사적인 눈물이었을 뿐이다. 만약 길거리에서 어떤 치매 노인이 엄마를 찾으며 울었다면 나라도 눈물을 펑펑 쏟았겠지만 극장에 앉은 관객인 나는 오히려 기분이 싸늘해졌다.  작가는 비겁하고 구차하게도 마지막에 한 번쯤 강한 신파로 관객의 눈물을 땡겨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정말 눈물을 뽑아내고 싶었다면 연극 전반부에 최소한의 복선과 감정선을 만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막판에 별안간 뜬금없이 엄마를 소환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구축해 놓은 이 작은 지옥의 폐쇄성과 몰입마저 스스로 무너뜨리고 만 것이다.

    거기다가 마지막 마무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연극은 다시 맨 처음 장면으로 돌아감으로써  전체 시공간의 환상성과 폐쇄성을 강조하는데, 이게 무슨 쌍팔년도 구성이란 말인가. 다시 말하지만 1879년 작품이라면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2023년 연극이 이렇게 닳고 닳은 방식을 뻔하게 답습해서는 안된다.  이 연극은 이미 진행 과정에서 환상성과 폐쇄성이 충분히 노골적인데도, 마지막에 딱히 반전의 충격도 없는 이런 진부한 결말을 왜 택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연극에 대해 총평은  '애매모호', '우유부단',  '무미건조'한 희곡을   '애매모호', '우유부단',  '무미건조'하게 연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배우들의 연기마저  '애매모호', '우유부단',  '무미건조'해진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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