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야, 너 이쪽으로 올래?”
핸드폰 너머에서 희진이가 다짜고짜 외쳤다. 시계를 보니 밤 9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희진이 목소리 뒤로 음악 소리가 요란했다.
“뭐?”
“나 지금 친구들하고 술 한 잔 하고 있는데, 지금 이리로 오겠냐고. 민규하고 유정이도 같이 있어.”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술자리에서 희진이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민규와 유정이와도 몇 달 전에 그렇게 만나서 친분을 쌓았다.
“알았어. 지금 갈게.”
전철을 타고 40분 남짓 걸려서 희진이가 알려준 ‘안젤라’ 호프집에 도착했다. 유럽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정확히 ‘유럽 분위기’란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온통 하얀색 일색인) 술집이었다. 세로로 길게 뻗은 좁은 창문 안으로 짙은 색의 나무 테이블과 회색 갓을 씌운 은은한 조명, 나무를 깎아 만든 엔틱 소품들이 보였다. 둥그런 초록색 유리를 끼운 작은 창이 나 있는 출입문을 열어젖히자 경쾌한 음악과 왁자한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나는 누군가와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서 멈칫거렸다. 내가 들어서는 걸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음악과 리듬과 웃음에 파묻혀 다른 그 무엇에는 조금도 관심 없이, 오직 자신이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사람들, 음식들, 술잔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는 비트가 있으면서도 제자리를 맴도는 것만 같은 음악 속으로 미끄러지듯 발을 옮겼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턱을 주억거리며 두리번거리다가 나 역시 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기억해냈다. 여러 가지 색깔로 염색한 머리들, 세련되지만 싸구려인 장신구들, 최신 유행하는 농담들, 허황된 장담들, 경박한 웃음들, 사람을 얕보는 눈빛들, 치즈가 잔뜩 들어간 안주들, 외국산 맥주들……. 세상에, 나도 이들처럼 젊디젊었다. 고작 29년을 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시작도 끝도 없이, 나이도 없이, 까마득히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굴고 있지 않나.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생각보다 내부가 넓어서 좀처럼 희진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희진이가 그새 다른 술집으로 자리를 옮긴 게 아닐까 초조해지려는 찰나 가게 안쪽 원형 테이블 앉아있는 희진이를 발견했다. 그녀는 여섯 명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멈추어 서서 그 즐거운 모습들을, 마치 지금 막 연극이 시작된 것 같은 활기찬 모습들을 바라보았다. 저 자리에 끼어들고 싶기도 하고 또 그냥 돌아서고 싶기도 한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 위로는 영어 가사의 느릿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있는 구절이라고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last time’뿐이었다.
나는 희진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녀는 옆 사람과 얘기하느라 내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이미 취기가 올라 얼굴이 발그레했다.
“아, 왔어? 앉아, 여기.”
희진이는 뒤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가 자기 옆자리에 내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안녕. 오랜만이다.”
앉으면서 일단 눈에 띄는 민규와 유정이에게 인사를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여기는 민주야. 김민주. 대학교 때부터 친구야.”
희진이가 모두에게 내 소개를 했고 나는 꾸벅 목인사를 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민주는 수연이 처음 보지? 민주야, 인사해. 내 고향 친구인 수연이야.”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헤헤거리다가 희진이의 말에 소스라쳤다. 그리고 그제야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수연이를 알아보았다. 사진보다는 좀 통통했지만 익숙하게 처진 눈매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희진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수연이는 내가 온다는 사실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는지, 어쩌면 희진이가 내게 전화를 할 때부터 옆에 있었는지, 별 놀라는 기색도 없이 싱글거리면서 인사를 해왔다. 나는 “아, 예에, 안녕하세요. 저도 말씀 많이 들었어요” 하고 일단 수연이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엉거주춤 앉아있었다. 9년 동안 몇 번이나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계속 어긋났었는데 느닷없이 이렇게 마주치고 나니 얼떨떨하기만 했다. 무려 9년 동안 얘기로만 들어왔던 수연이었다. 희진이와 20년 지기 친구, 희진이가 예전에 좋아했었던, 희진이에게 화장을 가르쳐주었던 그 수연이었다. 나는 이미 수연이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성격부터 취향, 습관, 좋아하는 음식, 살아온 과정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사람을 그토록 속속들이 안다는 건 다소 기묘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실제로 만난다는 건 더더욱 기묘한 일이었다.
“진짜 희진이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서울에 올라와서 제일 친하게 지내는 (수연이는 일부러 ‘서울’을 강조했을까?) 친구라고. 언제 만나 뵙나 했더니 오늘 뵙네요.”
나는 사진에서보다 수연이의 머리가 짧아진 것을 눈치 채고는 무심결에 ‘머리 자르셨나 봐요’라고 할 뻔했다.
“작년에 대전에 놀러 오셨을 때 같이 만났으면 좋았을걸. 그때 못 만나서 아쉬웠어요. 다 같이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요. 아, 그런데 혹시 들으셨어요? 저 이번에 서울로 이사 오는 거요.”
나는 대답 대신 희진이를 돌아보았다.
“아, 이번에 수연이가 서울로 올라오게 됐어.”
희진이는 딱히 나에게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었다는 듯이 간단히 대답했다.
“그럼, 어디서 사시는 거예요?”
나는 기계적으로 묻다가 혹시 희진이와 같이 살게 되는 건가 싶어 말끝을 흐렸다.
“왕십리요. 좋은 집이 나와서 어제 계약했어요.”
그 뒤로 우리는 술을 마시며 순조롭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나는 차분하게 수연이를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수연이는 희진이에게 들어왔던 수연이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서로를 연상시키는 점이 있었다. 흡사 예전에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다 큰 딸을 보고 있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처음 본 그 딸에게서 엄마의 오래전 모습을 찾게 되는 것이다.
“야, 근데 너희들 계속 서로 존댓말 할 거야? 그냥 말 놔. 앞으로도 자주 보게 될 텐데.”
내 옆구리를 툭 치며 희진이가 말했다. 나는 순간 빈정이 상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런가? 그럼, 우리 이제부터 서로 반말 할까요?”
수연이가 흔쾌히 되물었고 나 역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단번에 말을 놓지 못하고 쭈뼛거리고 있는데, 수연이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해 대부분은 남자 친구에 대해서였다.
“3년 넘게 사귄 남자친구가 있거든. 실은 이번에 오빠가 서울로 올라오게 돼서 나도 따라 올라온 거야. 오빠가 첫 발령이 났는데, 중학교 선생님이야. 학교는 신당동에 있고. 그래서…….”
수연이가 슬쩍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차피 앞으로 알게 될 테니까 미리 말하는 건데, 저, 실은 말이야, 나 남자 친구하고 같이 살 거야. 왕십리에서. 결혼하기에는 아직 형편이 안 되고, 따로 살자니 그것도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아서 말이야. 어차피 곧 결혼할 거니까 이상하게 보지는 말아줘.”
수연이는 생글거리며 단번에 할 얘기를 다 해버렸다. 나는 그녀의 거리낌 없는 태도에 당황했다. 우리는 고작 한 시간 전에 만났을 뿐이었다. 의견에 있어서 직설적인 희진이도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떠벌리지는 않았다. 이런 종류의 솔직함은 내 경험상 매우 드문 것이었고 또 과한 것이었다.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무장해제함으로써 오히려 상대방을 무력하게 길들이는 일종의 전략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은 음, 늦어도 내년 가을쯤에는 하려고 해. 당연히 그때까진 애가 생기지 않게 조심해야지. 뭐, 피임은 철저하게 하고 있지만 가끔 불량 콘돔이 있다고 해서 걱정이야. 그런데 피임약은 영 내키지 않아서 말이야.”
초면에 피임 얘기까지, 나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