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순진하게 (26)

by 곡도





“근데 너는 무슨 일을 해?”

수연이가 내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며 물었다. 그녀가 내 직업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의아했다. 그녀가 동화 작가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걸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출판사에서 편집 디자인 일을 하고 있어.”

“출판사? 와, 멋지다.”

“별로 그렇지도 않아. 조그만 출판사야.”

“그래도 책을 만든다는 게 멋있잖아. 작가들도 많이 만나겠네? 소설가나 시인 뭐 그런 사람들.”

“그거야, 그렇지.”

그렇지만 우리 출판사에는 진정한 의미의 ‘작가’라고 불릴 만한 작가는 없었다.

“그럼 나도 너한테 잘 보여야 되겠는데?”

“어?”

“실은 나 동화 작가가 되고 싶거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그러니까 너한테 잘 보이면 나중에 너희 출판사에서 책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니, 우리 출판사는 동화책은 안 하는데.”

“아아, 그래?”

그녀는 정말 실망했는지 입술을 몇 번이나 오물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난 지금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있어. 아직 이것저것 여유가 없어서 천천히 하는 중이야. 일단은 취직을 해서 돈부터 좀 모아볼까 해. 뭐든 돈이 좀 있어야겠더라고. 그림은 저녁하고 주말에 틈틈이 그리려고. 뭐, 물론 힘은 들겠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

그렇지만 희진이의 말에 따르면 수연이는 직장을 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이리저리 알아보는 척하면서 시간만 끌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한 인테리어 사무소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미적거리다가 포기해버렸다고 희진이가 분해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희진이는 수연이가 정말 동화 작가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그림도 열심히 그리지 않을뿐더러 그린다고 해도 언제나 낙서처럼 끄적여놓는 모양이었다. 수연이가 그저 ‘준비’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모든 걸 유예시켜놓고서 어린애처럼 태평하다고 희진이는 툴툴거렸다.

내가 수연이에게 적응하려고 애쓰는 사이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모두들 술을 많이 마셨다. 그만큼 많은 농담들과 핀잔들이 오고 가고 조금은 경솔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들 기분이 들떠 있었다. 아마 수연이 옆에 앉아 있던 은경이가 (희진이와 수연이의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했다) 결혼을 한 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민규가 2년째 준비하고 있는 공무원 시험에서 또 떨어졌기 때문이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안주가 입에 잘 맞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모두들 흥청망청했고, 흥청망청하지 않으면 자칫 우수에 잠길 것 같은 예감에 쫓겨 서로를 향해 아무 농담이나 내던지곤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술자리가 그렇듯 술집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모두들 주눅이 들고 조급해져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혹은 조금이라도 빨리 다시 혼자가 되기 위해) 재빨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연이는 희진이 옆에 바짝 붙어서 돌아가는 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희진이 집에서 묵을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어정쩡하게 그들 주변을 서성였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 아니면 희진이와 수연이 곁에 남아 있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 어느 쪽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민주야, 너는 어떻게 할래? 집에 갈래? 아니면, 우리 집에 같이 갈까?”

마침내 희진이가 나에게 물었다. 차라리 둘 중 하나만 물어봐 주었으면 ‘그래’라고 대답하기 좋았을 텐데 선택을 하라니 곤란했다.

“글쎄, 어떻게 할까. 아냐, 늦었는데 그만 집에 가야지. 내일 회사도 나가야 하고.”

나는 결국 이렇게 대답하고 한숨을 돌렸다.

“왜, 같이 가요.”

수연이가 존댓말로 나를 붙잡다가 다시 고쳐 말했다.

“같이 가자. 우리 셋이 희진이네서 한잔 더 하자. 이대로 헤어지기 섭섭하잖아.”

“글쎄.”

나는 수연이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슬쩍 희진이를 쳐다보았다. 희진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 우리 집에서 바로 출근하면 되잖아. 내 옷 빌려 입어도 되니까.”

그러나 나는 희진이가 나를 충분히 붙잡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딱 꼬집어 뭐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어딘지 무성의했다. 자기는 아무래도 좋으니 네 마음대로 하라는 투였다. 물론 희진이는 늘 그런 식이었지만 오늘따라 참을 수가 없었다.

“아냐, 시간도 너무 늦었고, 오늘은 그냥 갈게.”

나는 일부러 깍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래? 그럼 그렇게 하지 뭐. 너 전철 타고 갈 거지?”

희진이는 역시나 나를 붙잡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게 편하지.”

나는 머쓱하게 대답했다.

“수연아, 우리도 전철 타고 가다가 버스로 갈아타자. 여기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려면 한참 걸어야 돼.”

결국 우리는 셋이서 나란히 전철역으로 향했다. 희진이가 수연이와 내 중간에 서서 걸었다. 희진이는 한 번은 오른편에 있는 내게 얘기하고 그다음은 왼편에 있는 수연이에게 얘기하는 식으로, 또 수연이와 내 얘기를 서로에게 전하거나 우리에게 새로운 화제를 던지기도 하면서 즐겁고 분주했다.

“잠깐만, 저것 봐.”

갑자기 수연이가 한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다른 손으로 볼을 감싸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와 희진이는 수연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수연이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기 저거, 저 간판 말이야. 저런 거 정말 웃기지 않아? 아니, 웃기다고 해야 하나, 얄궂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생각하면 무섭기도 하고. 그렇지?”

어깨를 들썩이는 수연이의 말에 다시 돌아보니 ‘복기와집 돼지 숯불갈비’라고 쓰여 있는 붉은색 간판이 건물 정면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크기가 좀 크다는 것 외에는 그저 평범한 음식점 간판일 뿐이었다. 대체 무엇이 웃기고 얄궂다는 걸까? 더더군다나 무섭다는 건 또 무슨 뜻일까?

“모르겠어? 간판 안에 돼지 그림말이야. 한 손에는 삼겹살이 꽂혀 있는 포크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엄지손가락을 앞으로 쭉 내밀고서 저렇게 웃고 있잖아.”

“그게, 왜?”

희진이가 영 모르겠다는 투로 대꾸했다.

“생각해봐. 사람들에게 돼지고기를 대접하는 행복한 돼지라니.”

나는 귀밑까지 말려 올라간 돼지의 미소를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간판뿐만이 아니라 식당 벽에도, 직원들 가슴에도, 메뉴판에도, 탁자 위의 냅킨에도 온통 저 ‘행복한 돼지’의 얼굴이 보란 듯이 붙어 있었다. 그 친절한 미소를 앞에 두고서 탁자 위에서는 벌건 핏물이 흥건한 돼지 살점이 끊임없이 구워지고 사람들은 그걸 태연하게 입속에 우겨 넣고 있는 것이다. 하긴 고대로부터 육식은 언제나 살해가 아닌 순교이며, 모든 폭력은 가해가 아닌 희생이었다. 그것을 일찌감치 간파한 기독교가 이것을 전면에 내세워 고객 특화에 성공하지 않았나. 세상의 그 수많은 유구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미소로 난도질당하고 눈물로 태워지는 육체에 대한 식욕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걸 나는 명심해야 한다.

“사람은 정말 비위가 좋네.”

희진이가 중얼거렸고 우리는 함께 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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