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순진하게 (28)

by 곡도




“어떻게 할까? 내일 일요일이라서 나는 상관없는데.”

나는 넌지시 희진이에게 물었다.

“난 좀 곤란한데. 내일도 출근해야 돼. 아침부터 중요한 예약 손님이 있어.”

“아침에 여기서 바로 가면 되잖아.”

수연이가 졸랐다.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니네 집보다 여기가 레스토랑에서 더 가깝기도 하고.”

희진이는 몇 번이나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수연이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술을 더 가져오기 위해 부엌으로 달려갔다. 나도 한 숨을 돌리며 빈 술병들을 모아 테이블 옆으로 밀어놓았다. 늘 그렇듯 최종 결제를 내리는 사람은 언제나 희진이었다. 거기에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구보다 늦게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뜸들이기, 마지못해 허락하기, 그러면 누구나 최종 결정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뻔한 일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 어렵기만 했다.

그날 밤, 희진이는 술에 취해 제일 먼저 곯아떨어졌다. 술이 센 희진이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사실은 내가 희진이의 잔에 쉴 새 없이 술을 채워주었던 탓이었다. 심지어 술을 빨리 마시게 하기 위해 수시로 건배를 권하기도 했다. 말하고 보니 무슨 비겁한 협잡이라도 꾸몄던 것 같지만, 단지 나는 희진이가 조금만 빨리 잠들어주기를 바랐던 것뿐이었다. 수연이와 가까워질 기회를 갖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까지 수연이에게 나는 희진이에게 딸려 있는 부록 정도에 불과했고, 그건 자칫 앞으로 나를 ‘수연이와 희진이’에게 딸려 있는 부록쯤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거기다 수연이에게 있어서 나와 희진이의 동등함을 확보하는 것이 곧 희진이에게 있어서 수연이와 나의 동등함을 확보하는 길이라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는 또 하나 꼭 해결해야만 하는 의문도 있었다. 그동안 나는 수연이를 직접 만나기만 하면 왜 희진이가 수연이를 좋아했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음악이나 향수처럼 그 어떤 설명 없이도 직관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수연이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너무나 어려운 수수께끼를 직면한 사람처럼 당황스럽고 참담했다. 한마디로 수연이는 도무지 별 볼 일이 없었다. 외모도 평범했고, 성격도 두드러진 곳이 없는데다가, 그렇다고 어떤 특별한 재능이나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흔하다는 말조차 거추장스러운 그런 평범하고 시시한 여자에 불과했다. 그런 수연이에게 자존심 강하고 까다롭고 무엇에든 눈이 높은 희진이가 왜 마음을 빼앗겼는지 나는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희진이는 벌써 잠 들었네.”

수연이는 소파에 늘어진 희진이에게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었다. 나는 혹시 수연이가 우리도 그만 자자고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수연이는 다시 자리에 앉아 젓가락으로 안주를 뒤적였다.

“내가 안주 좀 만들어볼까?”

나는 수연이가 지루할까 싶어 얼른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

“아, 그럴래? 그럼 땡큐지.”

나는 냉장고에서 양파, 마늘, 감자를 꺼내어 잘게 자른 뒤, 프라이팬에 마가린을 녹여 재료들과 계란을 넣고 재빨리 볶았다. 마지막으로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니 대충 먹을 만한 안주가 되었다.

“와, 맛있다. 요리 잘하나 봐?”

“아니, 혼자 살다보니까 이것저것 대충 할 줄 아는 거지, 뭐.”

“저번에 보니까 희진이도 요리 잘하더라. 대전에 내려왔을 때 자기 레스토랑 주방장한테 배웠다면서 베이컨 그라탕을 해줬는데 끝내주게 맛있던데. 다음에는 라자냐도 해준다고 했어.”

화제가 다시 희진이 쪽으로 돌아가자 나는 초조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나마 공통된 화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수연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니, 내가 아닌 희진이의 눈으로 수연이를 보려고 노력했다. 희진이에게 수연이는 어떻게 보였던 걸까. 내가 볼 수 없는 어떤 것을 희진이는 보았을까. 아니면 내가 보는 어떤 것을 희진이는 보지 못했을까. 나는 수연이가 유리 소주잔을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잡고서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 입술로 슬쩍 잔을 물고 술을 한 모금 넘긴 후 입가를 날름 핥는 모습을 샅샅이 탐색했다.

“그러고 보니 희진이는 화장도 안 지우고 잠이 들었네. 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화장은 꼭 지우고 자는데. 자기 전에 이것저것 챙겨 바르는 것도 많고. 원래 얼굴에 유난을 떨잖아. 뭐, 이 얼굴이면 그럴 만도 하지만. 아,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 희진이한테 처음 화장을 가르쳐 준 사람이 누군지 알아? 바로 나야. 의외지? 다들 그 반대라고 생각하더라.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봄방학 때 내가 우리 집에서 처음 희진이에게 화장을 해줬거든. 그런데 고등학교 입학식 날 학교에 갔더니 희진이가 교문 앞에서 벌을 서고 있는 거야. 알고 보니 글쎄 이 기집애가 학교에 화장을 하고 온 거야. 교무주임이 손가락으로 희진이 어깨를 쿡쿡 찌르면서 ‘넌 도대체 누구한테 화장을 배웠길래 겁도 없이 입학 첫날부터 화장질이냐’고 호통을 치는데 내가 다 민망해서 혼났다니까.”

말끝에 수연이는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벌써…….”

그녀는 잠시 눈동자를 굴렸다.

“13년 전이야. 와, 시간 정말 빠르다. 그러고 보니 희진이와 알고 지낸지는 20년이나 됐네.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이 되면서 친해졌으니까. 그때는 둘 다 천방지축 어린애였는데. 희진이는 늘 커다랗고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지. 고등학교 때 라식 수술을 하면서 안경을 벗은 거야.”

나는 재빨리 수연이 말에 끼어들었다.

“내가 희진이를 만난 것도 벌써 9년 전이네.”

하지만 수연이는 나와 희진이의 얘기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 우리도 벌써 서른 살이야.”

수연이가 외쳤다. 나는 아직 스물아홉 살이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실감이 나? 우리가 서른 살이라니. 서른 살은 영영 안 올 줄 알았는데. 시간 진짜 빠르지?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간다잖아. 시간에도 가속이 붙는다나. 아휴, 도무지 상상이 안 돼. 우리도 언젠가 40살이 되고, 50살이 되고, 결국 60살, 70살이 된다니 말이야. 그러다가 마침내 내가 죽는 순간이 닥치면 어떨까? 3초, 2초, 1초 그리고 땡……. 그럼 어떤 기분일까?”

난 좀 당혹스러웠다. 이런 주제를 이렇게 불시에 아무렇지 않게 떠벌리는 수연이가 우스웠다. 게다가 무슨 카운트다운도 아니고 3초, 2초, 1초라니. 하지만 1초까지 세었을 때 나는 그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연이 말대로 언젠가는 분명 그런 순간이 올 것이다. 내가 죽어가는 순간, 당장 숨이 넘어가는 바로 그 순간 말이다. 3, 2, 1..... 0. 0? 아니 더 이상 뒤에 마침표도 물음표도 찍을 수 없는 0 이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 나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 말이야, 혹시, 죽는 순간에, 자신의 전 인생이 영화처럼 머릿속에 펼쳐진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게 된다는 얘기 말이야.”

나는 말을 꺼내놓고는 겁에 질려 수연이를 바라보았다. 희진이에게도 해 본적이 없는 얘기였다.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또 한심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수연이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는데. 그게 뭔데?”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한다 해도 수연이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군색하고 듣기에는 유치한 그런 얘기였다. 그저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3, 2, 1…… 그 순간 불이 꺼지고 나면 너는 네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보게 될 거라고, 그걸 다 볼 때까지는 잠시나마 안심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것을 다 보았을 때쯤에는 충분히 진지하고 또 피곤해져서, 어쩌면, 너는 적당히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그게 뭔데?”

수연이는 다시 한 번 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저기 말이야, 마지막 순간이 오면,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아?”

“마지막 순간?”

“죽을 때 말이야.”

“죽는 순간?”

수연이는 왼쪽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또 다시 왼쪽으로 한 번 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괜한 말을 꺼냈다 싶었다. 그만 술상을 치우고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특별한 건 아닐 것 같아.”

별안간 수연이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크게 떴다.

“뭐랄까. 죽는 순간 떠오르는 건, 어쩌면, 굉장히 사소한 것들이 아닐까? 예를 들면, 누가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싱거운 농담 같은 거. 사소한 수다의 한 구절이나, 어느 한적한 버스역 이름, 어릴 적 책상 위에 놓여 있었던 장식품, 좋아하지도 않는 참외의 맛 같은 거 말이야.”

그게 뭐냐며 웃어넘기려다가 나는 갑자기 숨이 탁 막혔다. 정말 그랬다. 어쩌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는 순간 떠오르는 건 평생의 그 길고 다난하고 거창한 이야기 따위가 아니라, 수십 만 번 정도 그렇게 웃었을 싱거운 웃음 한 토막이 아닐까? 모든 게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까마득히 떨어져 내릴 때, 그 위로 반짝이면서 천천히 가라앉는 가장 가볍고 작은 먼지들 말이다. 내가 대답이 없자 수연이는 다시 고개를 왼쪽으로 갸웃거리더니 수줍게 웃었다.

“너무 시시한가?”

내가 수연이를 사랑하게 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자고 있는 희진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무슨 꿈이라도 꾸는 건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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