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순진하게 (29)

by 곡도





다음 날 아침 나는 희진이가 욕실로 들어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머리가 욱신거려서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다가 내가 거실 바닥에 이불을 둘둘 말고 누워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내 옆에는 수연이가 다른 이불에 파묻혀서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꽤 깊은 잠에 빠졌는지 욕실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며 샤워기 물소리에도 (집이 작아서 그 모든 것들이 소란스럽게 느껴졌는데도) 아랑곳없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나는 수연이의 숨소리와 희진이의 물소리를 동시에 들으며 다시 나른하게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출근하는 희진이를 따라 나도 나가야 하나, 역시 그래야겠지, 가다가 간단하게 아침이라도 먹자고 할까, 등등의 생각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노래 곡조처럼 머릿속을 성의 없이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오르락내리락 사근거리는 숨소리, 관자놀이를 두드리는 샤워기 물소리, 창밖에서는 자동차 엔진 소리, 멀리서 딱딱 강아지 짖는 소리, 그리고 밝은 햇빛과 그 햇빛만큼이나 투명한 그늘, 아까울 만큼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그때 더럭 욕실 문이 열리는 바람에 나는 서둘러 이불 속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거실을 가로지르는 희진이의 사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길게 목을 기울이고서 치렁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아 올리는 희진이의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희진이는 바로 내 옆에 앉아 가방에서 화장품을 꺼내며 부산을 떨었다. 그러나 나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희진이가 화장을 마치고 머리를 드라이하는 동안에도 내내 꼼짝하지 않았다. 급기야 내 이름을 부르는 희진이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민주야, 민주야, 일어나봐. 이제 그만 가야 돼. 늦었어.”

희진이가 조급한 목소리로 여러 번 나를 재촉했다. 그래도 내가 대답이 없자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하는 수 없이 막 눈을 뜨려는데 수연이의 갈라진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아, 민주는 일어나기 힘들 거야. 아침이 다 돼서야 잠들었거든.”

“왜 그렇게 늦게 잤어?”

“나하고 술 마시다가.”

“그래? 그래도 일어나야 돼. 나 늦었어.”

희진이가 야박할 만큼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바로 나가야 돼.”

“그냥 민주는 자게 두고 넌 출근해.”

“아냐, 집에 가서 자라고 해야지. 너도 불편하고. 현기 씨 오면 어떡해.”

“불편하긴 뭐가 불편해. 그리고 오빠도 저녁쯤이나 돼야 올 거야. 괜찮아.”

나는 숨소리를 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수연이가 내 편을 들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고, 한편으로는 희진이가 기어코 나를 일으켜 세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희진이는 뭔가 찜찜한지 (어쩌면 내가 평소에 잠귀가 밝다는 걸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말이 없었는데, 나를 보고 있는 건가 싶어서 괜히 몸이 달았다. 혹시 내가 제풀에 참지 못하고 찡긋 한 눈을 뜨고 희진이의 얼굴을 쳐다보기라도 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래, 그럼, 그러지 뭐. 나 먼저 갔다고 민주한테 전해줘.”

희진이는 곧바로 핸드백을 챙겨 들고 쌩하니 집을 나섰다. 수연이는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다.

수연이가 잠들어버리자 나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도로 잠들지도 못한 채 눈만 말똥말똥 뜨고 누워 있었다. 좀이 쑤셔서 희진이를 따라갈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쩐지 희진이에게 좀 미안하기도 했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소파 옆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수연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슬금슬금 책들을 뒤적였다. 족히 서른 권은 될 법한 시집과 그만큼의 소설, 경제와 정치에 관한 책 여러 권들이 잡다하게 뒤섞여 있었다. 나는 건성으로 그것들을 펼쳐보다가 '사이좋은 침묵'이라는 시집의 빈 여백에 누군가 갈겨 써놓은 낙서를 발견했다.

[나는 사랑한다. 그녀의 비루함과 진부함을 사랑해. 난 앞으로도 그녀를 사랑하겠지. 더 분노하기 위해서.]

나는 혹시 무언가 더 쓰여 있지 않을까 싶어 다른 장을 뒤적여보았지만 새 책처럼 깨끗하기만 했다. 이건 누가 써놓은 것일까? 수연이가? 수연이의 남자 친구가? 혹시 희진이가? 아니, 전혀 상관없는 다른 누군가의 책이 섞여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그때 수연이가 소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책을 등 뒤로 감출 뻔 했다. 나는 슬그머니 책 더미 속에 책을 밀어 넣었다.

“아, 언제 일어났어?”

수연이가 퉁퉁 부어올라 찌푸려진 눈을 억지로 끔뻑이며 물었다.

“방금.”

“희진이는 먼저 출근했어. 네가 너무 곤하게 자서 깨우지 않았어. 어머, 벌써 12시가 다 됐네. 진짜 오래 잤다. 배고프지 않아?”

수연이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이불에서 쏙 빠져나갔다. 그리고 산발이 되어 헝클어진 머리를 양손으로 쓸어 넘기며 냉장고를 뒤적였다.

“아, 어쩌지, 먹을 게 아무것도 없네. 밥도 없고 라면도 떨어졌어. 조금만 기다릴래? 내가 요 앞에 가서 라면 좀 사 올 테니까.”

수연이는 세수도 하지 않은 부스스한 얼굴로 머리만 대충 묶어 올리고는 분홍색 지갑을 손에 들었다.

“나도 같이 갈까?”

“아냐. 바로 요 앞이야. 금방 다녀올게.”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현관으로 달려갔다. 곧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현관문 쪽으로 고개를 쭉 빼고 그녀가 정말 나갔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특별히 딴생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였다.

나는 텅 빈 집 안에 혼자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돼서 가슴을 펴고 어슬렁어슬렁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어제 우리가 먹고 남긴 음식들이며 그릇들이 설거지통에 지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나는 물을 한잔 마시고 냉장고 문도 괜히 삐죽이 열어보고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거실 한가운데 멈추어 서서 짐짓 깔보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실에는 문이 세 개 있었다. 하나는 욕실 문이었고, 하나는 작은방, 나머지 하나는 침실 문이었다. 작은방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침실 문은 꽉 닫혀 있었다. 나는 작은방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안에는 커다란 보따리 두 개와 종이 상자 네다섯 개, 2인용 탁자, 의자 두 개,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하얀 대리석 무늬의 찬장 하나가 꽉 들어차 있었다. 아직 이 방의 용도를 정하지 못한 채 둘 곳 없는 짐들을 임시로 쌓아놓은 모양이었다. 방은 어두웠고 여름 내내 옷장 구석에 처박혀 있었던 스웨터 냄새 같은 게 먼지와 함께 맴돌았다. 슬쩍 종이 상자 하나를 열어보니 그릇과 양말 꾸러미만 잔뜩 들어 있을 뿐이었다.

상자 뚜껑을 닫고 그만 돌아서려는데 찬장 뒤쪽 구석 그늘진 자리에 놓여 있는 작은 철제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물감, 붓, 팔레트, 연필 등의 그림 도구들이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책상과 맞닿아 있는 벽에는 책이나 잡지에서 오려낸 듯한 크고 작은 일러스트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이곳이 수연이의 작업실인 모양이었다. 나는 수연이가 그린 그림을 찾기 위해 책상을 뒤졌다. 그러나 팔레트 밑에 아무렇게나 껴 있던 작은 그림 한 장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짙푸른 물속을 홀로 걸어가고 있는 작은 소녀의 그림이었다. 소녀는 멍한 얼굴로 그림의 오른쪽을 향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어느 시대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도시의 풍경이 거꾸로 비추고, 그녀 뒤로는 물고기 떼인지 아니면 물보라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지저분한 얼룩인지 알 수 없는 작고 흐릿한 반점들이 어지럽게 뭉쳐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것은 조악한 그림이었다. 기술적으로도 그렇지만 내용적으로도 그저 그림을 그린 본인에게만 어떤 감상적이고 심리적인 가치가 있을 애매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그 애매함이 마음에 들었다. 무책임하고 모순투성이지만 해석할 수도, 해석할 거리도 없는 그 게으른 무심함이 나는 싫지 않았다. 소녀는 마치 의미도, 필요도, 관계도 없이 존재하고 있는 세상 모든 것들의 현존인 것만 같았다.

나는 작은방에서 나와 (방문을 딱 아까만큼 열어놓는 걸 잊지 않았다) 시계를 확인했다. 고작 5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수연이가 돌아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더 남은 듯했다. 내 시선은 저절로 침실 쪽으로 향했다. 특히 굳게 닫혀 있는 문에 신경이 쓰였다. 물론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는 건, 그것도 수연이의 방만이 아닌 그녀의 남자 친구의 방이기도 한 곳에 몰래 들어가는 건 단연코 무례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무례’라는 건 실상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아야만 가능한 법이다. 상대방이 알지 못하는 무례라는 건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침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첫 느낌은 딱히 이것을 보기 위해 무례를 범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방은 간소했다. 약간 노란색을 띠는 벽지 탓에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나른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창문 밑에는 커다란 흰색 꽃무늬가 들어간 보라색 누빔 이불이 덮여 있는 더블 침대가 있고, 그 맞은편에는 바로 얼마 전에 새로 산 듯 멀끔한 베이지색 화장대와 컴퓨터 책상이, 문 옆으로는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나무 장롱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창문에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는 분홍색 비즈 장식이었다. 그것이 이 방에 여자가 산다는 유일한 증거였지만, 그 요란함이 이 밋밋한 방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오히려 수상해 보였다.

나는 슬쩍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쓰는 침대라고 생각하니 좀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우습게도 이쪽이 오히려 더 응큼하게 여겨졌다. 엉덩이에 힘을 주고 눌러보니 침대 매트리스가 생각보다 단단했다. 나는 한 번 더 엉덩이를 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번에는 매트 아래쪽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저절로 난잡한 상상이 떠오르는 건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나는 침대에 함께 누워 있는 수연이와 현기를 머릿속에 그려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저 오래 전 포르노 동영상에서 보았던 장면만이 조각조각 난 채 스치고 지나갔다. 하긴 나로서는 남녀가 어떻게 섹스를 하는지 실감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스스로도 한심한 생각이 들어서 괜히 슬쩍 이불을 젖혀보았다. 그리고 이불 아래 있던 하얀색 매트의 까실거리는 표면을 손바닥으로 가만히 쓰다듬고 있자니, 그들이 일주일에 몇 번이나 섹스를 하는지, 하면 어떤 식으로 하는지, 섹스 전에는 혹은 하고 나서는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그런 구체적인 것들이 궁금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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