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순진하게 (30)

by 곡도





잠시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던 나는 수연이가 올 시간이 다 된 것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젖혀놓았던 이불을 가지런히 펴고, 앉아 있던 자리는 손바닥으로 문질러 주름을 없앴다. 막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은색 물건이 내 시선을 끌었다. 그것은 거울처럼 반사되는 팔각기둥 모양의 케이스에 담긴 립스틱이었다. 팔각형 단면이 창문에 걸려 있는 비즈를 비추며 분홍색으로 반짝였다. 나는 당장이라도 수연이가 들이닥칠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립스틱을 집어 들고 뚜껑을 열었다. 밝은 갈색과 다홍색의 중간쯤 되는 차분한 색조의 립스틱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햇빛에 물든 벽지의 황금빛 때문에 내 얼굴도 샛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립스틱으로 입술을 칠했다. 색깔은 부드럽고 무난했지만 광택이 많아서 왁스라도 얹은 것처럼 번들거렸다. 희진이는 평소 광택이 많은 립스틱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손바닥으로 입술을 문질러 닦아내고는 립스틱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고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물론 나오면서 방문을 꼭 닫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래 기다렸지?”

잠시 후 수연이가 하얀 비닐 봉투를 손에 들고 집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 나는 소파에 앉아 여성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수연이가 부엌으로 들어가 라면을 끓이는 동안 나는 주머니 속의 립스틱을 몰래 손아귀에 쥐어보았다. 손톱 끝에 부딪히는 딱딱한 감촉에 불연 듯 수치심이 들었다.

우리는 라면을 먹으며 잡다한 얘기들을 주워섬기다가 내년 봄에 셋이 함께 여행을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거 좋지, 어디가 좋을까, 남해안의 섬은 어떨까, 강원도도 좋다던데, 축제 기간에 맞춰서 가면 더 좋을 거야 등등의 얘기가 길게 이어졌다. 그때 갑자기 수연이가 프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왜?”

“아니, 희진이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걔는 사람들이 왜 여행을 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잖아. 어차피 갔다가 다시 올 건데 왜 떠나느냐고 투덜대니까.”

나는 미소를 지었다. 수연이 말대로 희진이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돌아오면 똑같은 장소, 똑같은 사람들, 똑같은 문제들이 그대로 있는데 굳이 멀리 돌아 올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행이란 그저 졸렬한 시간 끌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일상에서 벗어나는 게 마치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기 기만적인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게 희진이의 주장이었다. 실제로 그 동안 희진이와 함께 여행을 했던 적은 두어 번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숙소와 편의 시설이 잘 갖추어진 번듯한 관광지나 돌아보는 수준이었다.

“희진이는 뭐든 좀 냉담하잖아.”

나는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그런 면이 있지. 너무 똑 부러지려고 하니까. 자기주장도 세고.”

수연이도 선선히 인정했다.

“맞아. 학교 다닐 때도 그런 일로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그랬을 거야. 안 봐도 뻔하다. 솔직히 희진이는 그 매몰찬 성격을 좀 고쳐야 돼.”

희진이의 흉을 보면서 우리는 어느새 10년이 넘은 친구 사이같이 스스럼이 없었다. 각자 희진이를 알아왔던 시간만큼이나 서로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살가운 기분이 들었다. 그 바람에 나는 그만 물고 있던 말이 입 밖으로 쓱 새어나오고 말았다.

“희진이의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게 꼭 이상한 일만은 아니지.”

수연이는 내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라면을 가득 말아 올렸다.

“뭐가?”

나는 길고 뾰족한 가시를 이빨 사이로 씹고 있는 것처럼 입술을 우물거렸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내 말을 얼버무릴 수 있었다. 희진이의 거만함에 대한 얘기였다며 어물쩍 말을 돌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수연이를 만나기 전부터, 그러니까 수연이를 좋아했었다고 희진이가 내게 말했던 그때부터, 그리고 수연이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수연이와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내내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 좀이 쑤시던 참이었다.

“글쎄, 있잖아, 그게, 희진이는 다른 사람들하고는 좀 다르잖아.”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딱 잘라 말했다. 분명 한 친구의 비밀을 다른 친구에게 폭로하는 것만큼 비열한 짓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경우는 폭로라고 할 수가 없었다. 수연이는 이미(나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이건 그저 서로 마음을 터놓자는, 다시 말해서 진짜 친구가 되자는 노골적인 제안에 불과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단번에 가까워지기는 섹스만 한 것이 없고, 그다음으로는 비밀을 함께 공유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전자가 연인이 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면, 후자는 친구가 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희진이에게 남자 친구가 없는 이유 말이야. 너도 알고 있다고 희진이가 그러던데.”

“아, 그거? 알고는 있지만…….”

수연이는 내가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전에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내 얼굴을 빤히 살펴보았다. 그제야 나는 수연이가 나 역시 레즈비언이라고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발끈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다가 ‘으흥’ 하는 어중간한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수연이가 직접적으로 물어본 것도 아닌데 내 쪽에서 먼저 정색을 하며 부정하는 것도 우스웠고, 또 당분간 그 문제는 애매하게 남겨두어도 좋을 것 같았다.

“처음 희진이한테 그 얘기 들었을 때 어땠어?”

나는 짐짓 젓가락으로 냄비 안을 휘휘 저으며 물었다.

“아무래도, 놀랐지.”

수연이의 한쪽 입술이 보일락 말락 찡그려졌다.

“희진이가 뭐라고 했는데?”

“글쎄. 그냥, 그런 얘기였어.”

나는 얼버무리며 고개를 숙이는 수연이의 촘촘한 갈색 속눈썹을 한 가닥씩 세어보면서 머릿속으로는 어두운 골목길 구석에 서있는 두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둘 다 갈색 체크무늬 치마와 검은색 카디건을 걸친 교복 차림에 단정한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사실 이것은 내 고등학교 때 교복이었다.) 안경을 낀 예쁜 소녀가 이마를 숙이며 무언가를 속삭이자 다른 소녀가 어눌해진 표정으로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내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희진이가 정확하게 뭐라고 했는지, 또 수연이는 뭐라고 대꾸했는지, 그것은 온전히 저 두 사람만의 이야기였다.

“너라면 어떨 것 같아? 만약에 어떤 여자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고백이라도 하면?”

불시에 질문해놓고는 나는 아차 싶었다. 내가 두 사람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걸 수연이에게 들켰을까봐 조마조마했다. 나는 재빨리 입 꼬리를 슬쩍 비틀어 올리면서 정말 시건방진 질문이 아니냐는 듯 장난스러운 눈짓을 해 보였다.

“어, 글쎄.”

수연이는 상기된 얼굴로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척 했다. ‘만약’을 핑계 삼아 솔직한 심경을 말해볼까, 아니면 아예 철벽을 치고서 딱 잡아 떼버릴까 고민했을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 내 입장에서 우스워 보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아니, 지금 나는 일시적인 변덕 때문에 지나치게 비아냥거리고 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분명히 해두자면, 내가 이 모든 것을 얕보고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순간순간 목이 멜 정도로 진지하고 또 한편으로는 절실하기도 하다. 다만 동시에 이 모든 게 참을 수 없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래도 역시 기분 나쁘겠지?”

나는 다시 슬쩍 찔러보았다.

“아니, 기분 나쁠 것까지는 없지.”

수연이는 의외로 담담한 말투였다. 희진이가 고백했던 그 순간에도 수연이가 이렇게 담담했을지 나는 궁금해졌다. 그때도 ‘기분 나쁠 것까지는 없지’와 같은 애매한 말로 뭉뚱그리며 별일 아닌 듯이 흘려버리고 말았을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심 감격해서 우쭐거렸을까.

“어찌 되었든 친구는 친구니까.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해.”

분명 ‘어떤 여자’라고 물어봤는데 자백하듯 ‘친구’라고 대답하는 수연이의 아둔함에 나는 웃음을 삼켰다. 그저 자기 편한 데로 생각하고 편한 데로 얘기하는 그 얄팍함을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건 그렇고, 희진이 요새 만나는 사람 있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수연이를 똑바로 보려고 했지만 그만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어쩌면 수연이도 나와 희진이의 관계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방금 그녀에게 했듯이 수연이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나에게 수작을 걸고 있는 게 아닐까?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나의 아둔함을 얕보고 있는 건 아닐까?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나는 얼버무리면서 슬쩍 수연이의 눈치를 살폈다. 수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아니, 딴게 아니라, 몇 달 전인가, 희진이하고 전화를 하는데 옆에서 ‘나 바지 좀 집어줘’ 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리더라고. 좀 느낌이 이상해서 슬쩍 희진이를 떠보니까 말을 돌리는 눈치가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어. 그래서 혹시 네가 아는 게 없나 해서.”

나는 혹시 그 여자가 내가 아니었나 열심히 생각해보았지만 기억날 리 없었다. 물론 그건 내가 아니라 희진이가 만나는 다른 여자들 중 한 명일 수도 있었다. 그들이 정확히 몇 명인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한두 명일 수도 있고 제법 많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 중 한 명 정도는 희진이와 꽤나 진지한 관계일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글쎄, 희진이가 나한테 그런 얘기는 잘 안 해서. 그런 건 물어보기도 쉽지 않고.”

“그래?”

수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무성의한 표정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수연이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희진이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니까.”

그 순간 또 한 번 나는 내가 수연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제비뽑기에서 우연히 ‘사랑’이라고 쓰여 있는 패를 뽑은 것과 같았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일이 벌어지고 나면 비로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어떤 일.

“현기 씨, 사랑해?”

내 뜬금없는 질문에도 그녀는 아무런 주저도 의심도 고심도 없이, 그리고 여전히 성의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사랑하지.”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계속)


[좀 더 순진하게 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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