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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Nov 17. 2023

좀 더 순진하게 (31)




      아침부터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편집장에게 된통 혼쭐이 난 탓이었다. 그는 출근한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자신의 책상으로 나를 불러내더니 어제 내가 제출했던 세면대 생산 공장의 홍보 책자 디자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늘어놓았다.  

      “김민주 씨, 여기서 일한 지도 벌써 2년이나 됐잖아. 그런데 아직도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면 어쩌나. 여기 아웃라인하고 이미지가 어긋난 게 안 보여? 여기 봐. 타이틀도 포맷이 너무 크고, 글씨체도 더 깔끔하게 못하는 거야?”

      워낙 시일을 다투며 급하게 들어온 일이라 디자인이 조금 거칠어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일이 지적받아야 할 만큼 형편없는 것은 아니어서 나는 좀 얼떨떨했다. 이제까지 이보다 더 조잡한 디자인도 문제없이 통과되곤 했던 것이다.

      “일이 밀려 있는데 내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들여다봐야겠냔 말이야. 그렇다고 김민주 씨가 내 월급을 더 줄 것도 아니잖아. 실력이 늘지는 못할망정 날이 갈수록 후져지니, 이래서야 월급만 꼬박꼬박 타 가는 게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우리 출판사 편집실에는 따로 편집장의 방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큰 사무실 하나에서 모두들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원색적인 비난을 나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고스란히 함께 듣고 있었다. 직원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어서 그들의 안색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모두들 편집장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다는 건 뻔한 일이었다. 편집장과 내가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모두들 냉큼 돌아앉아 이 일에 대해 수군댈 게 분명했다. 

      편집장은 왼쪽 귀 부근만 새하얗게 센 반백의 머리를 염색도 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어깨까지 기르고 양쪽 볼에는 흉터처럼 깊은 주름이 패어 있는 키 작은 남자였다. 이름은 박상구였는데, 그저 모두들 편집장님이라고 불렀다. 불같은 성격이라 부하 직원들에게 심하게 대할 때가 다반사였지만 특히 나에게는 유독 더한 것 같았다. 도대체 나의 어떤 면이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걸까. 이것이 나에게는 디자인보다 더 큰 업무였다. 한 편집부 동료는 내가 그의 백발을 자꾸만 쳐다보기 때문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마블 만화 속 등장인물 같은 그 헤어스타일에 눈길이 가는 사람이 나뿐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또 다른 동료는 내가 대기업을 스스로 걷어차고 이 작은 출판사에 입사했다는 사실이 편집장의 심기를 긁었을 거라고 짐작했고, 반면에 희진이는 내가 딱히 거스르는 점이 없다는 사실이 도리어 그의 부아를 돋운 거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는 분명 괴팍하고 깐깐한 남자였다. 하지만 회식 자리에서 기분이 좋을 때면 나도 좋은 사람이다, 여러분의 힘든 사정은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완벽한 인간은 아니며 때론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예전에 대기업에서 일할 때 실수로 오타를 내서 수십만 장의 카탈로그를 망치는 바람에 해고당했던 일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여러분은 잘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등등 마음을 담아 진솔하게 말할 때도 있었다. 특히 신입사원이 새로 입사할 때마다 오타 때문에 해고당했었던 얘기를 끄집어내곤 했는데, 나중에는 결국 모두들 지겨워져서 그의 솔직함을 비웃게 되었다. 그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건 아직도 그때의 앙심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둥, 다른 곳에서 이야기가 흘러들어올까 봐 먼저 선수를 치는 거라는 둥, 자격지심에 쫓겨 상대방의 반응을 떠보는 것뿐이라는 둥 의견도 분분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만한 드라마틱한 사건이 오직 그것뿐인 게 아니었나 싶다. 그 일은 그에게 벌어진 가장 큰 불행이자 오점이었을 테지만, 만약 그 일마저 없었다면 술자리에서 부하 직원들에게 침을 튀겨가며 무슨 얘기를 떠벌릴 수 있었겠는가.

      “조그만 출판사라고 대충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요새 여기에서라도 일하겠다고 덤비는 똑똑하고 유능한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해? 이렇게 가다간 김민주 씨도 오래 버티기 힘들 거야. 명심하라고.”

      그는 말끝에 파리를 쫒아내듯 손을 휙휙 저어 보였다. 나는 화가 나기보다는 그저 어안이 벙벙해서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아무 서류나 펼쳐 들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편집장과의 대화를 복기해 보아도, 정말 내 디자인이 그 정도로 형편없었던 건지, 아니면 그저 오늘따라 재수가 없어서 된통 걸려든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질척거리는 생각들과 뒤늦게 몰려오는 분노 때문에 점심시간 쯤에는 아주 피로해지고 말았다. 

      물론 이 모든 게 내게 새삼스러운 건 아니었다.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내 일에 대해 진저리를 치곤했으니까. 당장에라도 벌떡 일어나 이곳을 뛰쳐나간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뒤에 벌어질 일들이 손바닥을 뒤집듯 자명했다. 딱히 모아놓은 돈도 없으니 곧 다시 직장을 구해야 했다. 다른 경력도 특별한 기술도 없는 내가 편집 디자인 일을 다시 찾게 되리라는 것도 분명했고, 거기다 요즘은 디자인 쪽 취업난도 심각한 편이어서(여기에서라도 일하겠다고 덤비는 똑똑하고 유능한 애들이 많다는 편집장의 말은 허풍만은 아니었다) 지금의 출판사보다 더 대우가 좋지 않은 곳으로 가게 될 가능성도 농후했다. 진부하지만 결코 낡아지지 않는 표현처럼, 이것은 일종의 덫이나 다름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치욕적이었고, 마치 그네 묘기를 하는 사람처럼 이 올가미에서 저 올가미로 옮겨가야 한다는 점에서 더 견고했다. 10년 후, 20년 후는 생각하지 말고 지금 바로 내 발밑만 바라봐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균형을 잃고 끝없이 떨어져 내릴 거라고 했었던 대학 시절 규혁 선배의 말을 이제 나는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퇴근 후에도 도무지 기분이 풀리지 않은 나는 무작정 희진이 집으로 달려갔다. 처음에는 희진이를 붙들고 하소연이나 실컷 할 생각이었다. 구질구질한 생활을 구질구질하게 늘어놓아 구질구질한 동정과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막상 아무 내색 없이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다짜고짜 희진이를 끌고 침대로 갔다. 그리고 완전히 발가벗긴 희진이를 완전히 발가벗은 내 몸 위로 끌어올렸다. 희진이의 입, 코, 턱, 귀, 목,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나를 뒤덮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방비로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먼 세상은 더 멀리 사라지고 우리 두 사람의 피부와 피부가, 경계와 경계가, 한계와 한계가 마치 파도처럼 내게 밀려왔다. 하지만 그렇게 누군가와 부둥켜안아도, 몸을 섞어도, 자기 자신을 잊어도, 피부는, 경계는, 한계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복잡한 해안선을 그리며 지도제작자들을 골탕 먹일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좀 더 시간을 벌 수 있다. 아직 지도는 완성되지 않았다. 

      그때 내 핸드백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것이 수연이에게서 온 전화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희진이와 수연이에게서 오는 전화에는 다른 벨 소리가 울리도록 해놓았던 것이다. 그것은 수연이에게서 걸려 온 첫 번째 전화였고 나는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희진이의 품에서 빠져 나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나는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것이 수화기 너머에 있는 수연이 때문인지 아니면 바로 곁에서 벌거벗고 있는 희진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 민주야, 나야.”

      “어, 수연아.”

      “지금 뭐 해?”

      “그냥 별로, 그냥, 있어.”

      “어딘데?”

      나는 얼떨결에 사실대로 대답했다.

      “희진이네 집.”

      “아, 그래? 그럼 희진이도 옆에 있겠네?”

      “그렇긴 한데, 지금, 자.”

      “벌써? 그럼 일단 너한테만 물어봐야겠다. 딴 게 아니라, 이번 일요일에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지 않을래?”

      “국립중앙박물관?”

      “응, 현기 씨가 박물관 같은 데 가는 거 좋아하거든. 취향이 은근히 영감이라니까. 새로 지어진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고 싶다고 예전부터 노래를 불렀어. 이왕이면 여럿이 같이 가면 좋잖아. 혹시 가봤어?” 

      “아니, 못 가봤어.”

      “잘됐네. 희진이도 그 날 다른 약속이 있지는 않겠지?”

      나는 힐끗 희진이를 돌아보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희진이의 새하얀 가슴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양쪽의 크기가 좀 다른데다가 비교적 작은 편인 가슴은 희진이가 불만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신체부위였다. 내 가슴 정도 크기만 되었어도 좋았을 거라고 희진이는 종종 투덜댔지만 나는 그녀의 아담한 가슴을 꽤나 좋아하고 있었다.

      “별일 없는 것 같은데.”

      “그럼 일요일 1시까지 국립중앙박물관 매표소 앞에서 만날까?”

      “그래, 알았어.”

      “그럼 그 날 보자. 안녕.”

      나는 핸드폰을 도로 핸드백 안에 쑤셔넣고는 폴짝 침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수연이가 이번 일요일에 박물관에 가재. 현기 씨도 같이.”

      “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구경하고 싶다고.”

      “나는 박물관 별로인데.”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우리는 곧바로 다시 뒤엉켜 입을 맞추었다. 나는 희진이의 발을 잡고 발가락을 성의를 다해 핥았다. 그리고 발 등에서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허벅지 안쪽으로 입을 맞추며 희진이의 단단한 품속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었다. 어쩌면 이것도 일종의 덫이라는, 역시나 진부하지만 결코 낡아지지 않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곧 까맣게 잊어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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