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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Nov 24. 2023

좀 더 순진하게 (32)




      일요일  정오쯤 희진이와 나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하는 전철을 탔다. 주말의 전철 안은 한산했다. 등을 기대고 앉아 있자니 히터 때문에 나른하기도 하고 또 흔들리는 전동차 실내로 햇빛이 조각조각 비쳐 들어와 멍청한 기분이 되었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는 희진이의 이마가 가볍게 흔들렸다.  문득 전철에서 처음 희진이와 인사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 당시 희진이의 머리에 꽂혀 있던 나비 모양의 핀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스무 살의 희진이는 좀 더 동그란 눈에 뾰족한 턱, 풍성하게 파마한 머리는 구불거리고, 말투에는 미미하게 충청도 사투리 억양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희진이를 언니라고 불렀었지. 그게 벌써 10년이나 된 얘기였다. 10년이라니,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랍고 또 한편으로는 참으로 분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10년을 제대로 감정하기도 전에 희진이가 자동차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나는 내 눈앞의 희진이에게 집중해야 했다. 희진이는 자동차를 사려고 마음먹은 뒤로 틈만 나면 그 얘기에 열을 올렸다. 

     “사실 투스카니는 스포츠카라기보다는 쿠페라고 해야지.” 

     “쿠페?” 

     “쿠페는 세단과 스포츠카 중간이라고 생각하면 돼. 세단은 그냥 일반 자가용이라고 보면 되고.”

     희진이는 출력과 토크에 대해서 이것저것 설명했지만 차에 관해 문외한인 나는 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희진이가 차에 저토록 관심이 깊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된 나는 조금 놀랐다. 10년 가까이 가깝게 지냈는데도 때로는 처음 만난 사람처럼 의외의 점을 발견하게 된다는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나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차에 대해 신나게 떠드는 희진이가 낯설기도 하고 또 지루하기도 해서 나는 희진이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희진이는 길게 풀어헤친 머리 위에 갈색 베레모를 쓰고 갈색과 남색이 촘촘하게 가로지르는 체크무늬 코트를 걸치고서 검은색 레깅스와 검은색 부츠를 신고 있었다. 이렇게 멋지게 차려입은 희진이를 볼 때면 저 얇은 옷 아래 희진이의 하얀 나체가 있다는 게 언뜻 믿기지가 않았다. 바로 어젯밤에 직접 보고, 만져보고, 더한 짓까지 했으면서 말이다. 이것은 책의 한 페이지가 넘어간 것만큼이나 엄청난 단절이었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지만 실체는 낱낱이 분리된다. 하긴 그건 단지 희진이만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슬쩍 곁눈질로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보았다. 이렇게 점잖게 외투의 옷깃을 바짝 여미고 있는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짝을 지어 옷을 벗어재끼고 비벼대고 벌리고 부풀어 오르고 타액을 뱉거나 삼키고 엉덩이를 들썩이고 눈을 뒤집고 허우적거리면서 신음을 질러댄다고 어찌 감히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 괴리가 때때로 나를 곤혹스럽게 했고 또 때로는 고통스럽게 했다. 물론 누군가는 그것을 일컬어 인간의 본질이라고 규정지을 것이다. 하지만 ‘본질’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 ‘조건’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숙명’이라는 뜻일까? 나는 여기에 걸맞는 수 백 수 천 개의 단어들을 당장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사실 단어는 문장에 박아 넣는 장식 돌에 불과하다. 어떤 장식 돌을 쓰냐에 따라 각각의 미학적인 취향을 반영하며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을 테지만 중요한 건 문장 자체이며 장식 돌을 이리저리 바꾸어 끼거나 심지어 모두 빼낸다 해도 문장은 여전히 스스로 완전하고 무결하다. 

     이촌역에서 내려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해보니 수연이와 현기가 이미 매표소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연이는 살구색 원피스 위에 풀색 파카를 걸치고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야 현기 역시 같은 색 파카를 입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커플룩인 모양이었다. 같은 색 옷을 입고 꽤나 멋을 낸 두 사람은 썩 잘 어울려 보였다. 나는 슬쩍 내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어제 퇴근 후에 곧바로 희진이 집에 갔었기 때문에 회색 코트에 청바지를 입은 밋밋한 차림이었다. 얼마 전에 새로 산 짙은 보라색 공단 재킷이 떠올라 나는 퍽이나 아쉬웠다. 오늘같이 햇빛이 좋은 날 그 재킷과 민들레 꽃씨가 수놓아져 있는 흰색 치마를 입었다면 썩 잘 어울렸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현기는 우리를 보자마자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아무래도 인사는 그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모양이라고 나는 속으로 웃었다. 하긴 예전 집들이 때의 짧은 만남을 제외하면 처음 마주하는 샘이어서 나 역시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내게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마치 동양 사람을 생전 처음 본 서양 사람이 느낄 법한 무미건조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현기는 사뭇 단호한 얼굴과 말투로 바뀌었다. 그것이 자신의 흐릿한 인상을 의식적으로 보상하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박물관 건물이 불러일으킨 남성적인 흥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거 참 실망인데요. 이건 박물관이 아니라 왜군으로부터 보물을 지킬 성이라도 쌓은 것 같잖아요. 차라리 전쟁박물관이라고 하면 믿겠네요. 이럴 바에는 차라리 옛날 일본 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박물관으로 쓰는 게 더 나았죠. 그건 어쨌거나 고전적이고 역사적인 맛이라도 있었지, 지금 이 건물은 한국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다못해 현대적이지도 않아요. 한국의 미학을 살렸다고 대대적으로 떠들어대더니 결국은 무슨 국적 불명, 시대 불명의 창고 같은 꼴이니, 원.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거라던데 보나마나 유학파다 뭐다 경력만 화려하겠죠.”

     그는 박물관 입구를 지나 복도로 들어설 때까지 계속 투덜거렸다. ‘국적 불명’ ‘시대 불명’ ‘한국의 미학’이란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되었다. 하지만 수연이와 희진이가 그의 말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나라도(딱히 그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으면서도) 그에게 장단을 맞춰줘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는 현기와, 희진이는 수연이와 짝을 이루어 걷게 되었다. 

     현기가 입을 다문 건 긴 회랑 끝 땅 속에부터 홀연히 솟구친 듯 우뚝 서 있는 경천사지10층석탑을 보았을 때였다. 석탑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성큼성큼 높아지더니 그 앞에 서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20미터 높이의 유리 천장까지 닿아 있는 거대한 석탑은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한없이 섬세하고 또 고고해 보였다. 보고 있자면 돌로 만들어진 처마와 조각들이 어느새 얼음처럼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탑은 원래 남근의 상징이라지만 이 탑은 오히려 여신을 연상시켰다. 금강석처럼 단단한 무언가가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바로 직전과도 같은 아름답고 긴장된 평화가 서려 있었다. 예술이나 종교는 일종의 낭비라는데, 얼마나 많은 염원과 이야기들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두들겨대야만 이런 터무니없는 창조가 가능한 것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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