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곡도 Dec 08. 2023

좀 더 순진하게 (34)




     “아, 왔어? 재미있었어?”

     수연이가 나에게 묻는 것인지 현기에게 묻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시선으로 물었다. 내가 주춤거리는 사이 현기가 대답했다.

     “글쎄. 공간 구획이 영 별로인 것 같아. 문화재도 예전보다 훨씬 줄어든 것 같고.”

     하지만 질문한 수연이는 정작 듣는 둥 마는 둥 앞에 놓인 접시를 치우며 말을 바꾸었다.

     “좀 출출하지 않아? 오빠하고 민주도 뭐 좀 먹어. 여기 애플파이 맛있더라.”

     하지만 현기는 딱 잘라 말했다. 

     “아니, 그냥 나가자. 뭐하러 여기서 비싼 거 시켜 먹고 있냐.”

     사실 나는 다리도 아프고 또 애플파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수연이의 말이 반갑던 참이었다. 하지만 현기가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그의 의견에 반대하거나 나에게 의견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런가? 그럼 어디로 갈까? 음, 저기, 그럼 희진아, 우리 오늘 너희 집에 가면 안 될까?”

     수연이가 희진에게 물었다.

     “우리 집?”

     “응, 너희 집 근처에 호수공원 있잖아. 거기 한번 가보고 싶었거든. 거기 드라마에도 자주 나오더라. 저녁 먹고 나서 다 같이 그리로 산책 가자.”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어젯밤 내가 섹스 했던 장소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간다는 건 꺼림칙한 일이었다. 그리고 혹시 어떤 흔적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아침에 희진이가 정리하긴 했지만)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역시 아무도 나에게 의견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도 잠자코 있었다.

     “뭐. 그래도 되고.”

     나는 희진이가 순순히 허락하는 바람에 적잖게 놀랐다. 그리고 순간 저런 일을 나와 상의도 하지 않고 혼자 결정해도 되는 건가 하는 얼토당토않은 마음이 들어서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오빠, 괜찮지?”

     수연이가 현기에게 물었다. 하지만 현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냐, 안 돼. 오늘 집에 가서 시험 문제 만들어야 돼. 모레까지 제출해야 되거든. 좀 있으면 기말고사잖아. 미안해요.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다음에 정식으로 놀러 갈게요. 대신에 우리 어디 가서 밥이나 먹죠. 제가 살게요.”

     현기의 거절에 나는 내심 한숨을 돌렸고, 수연이는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박물관 근처에 있는 경양식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치렁치렁한 자주색 커튼과 나무 칸막이, 침침한 조명 등이 레스토랑보다는 시골 호프집에 가깝다며 희진이가 툴툴거렸지만 주변에 다른 마땅한 식당이 보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실내에 들어서자 사방에서 진동하는 토마토소스 냄새 때문에 나는 더 허기가 졌다. 다행히도 주문을 하자마자 뜨끈한 양파크림스프가 먼저 나왔다. 너무 게걸스럽게 먹지 않기 위해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신경을 곤두새우고 있는 사이, 돌연 수연이가 아까 보았던 유물들에 대한 감상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기가 카페에서 내내 수다만 떨고 있었던 건 아니라는 걸 현기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많은 유물들이 제작자나 작가를 알 수 없다니 참 애석한 일이야. 고려청자나 신라 불상이나 오래된 그림 같은 것들 말이야. 그렇게 몇 백 년, 몇 천 년이 지나도록 길이 남을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었는데도 이름 석 자 남지 않다니,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수연이가 혀를 차며 말했다.

     “뭐, 그 당시 그들은 예술가가 아니라 미천한 장인들이었잖아. 오히려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을 거야.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작품 이하인 사람들이었으니까.”

     현기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지금은 정 반대로 작가들이 작품 이상이라고 생각하죠. 오늘 날 작품은 작가를 입증하거나 평가하기 위한 포트폴리오에 불과해요.”

     희진이가 말했다.

     “맞아요. 이제 작품들은 작가들이 팬들에게 사인해준 메모지에 불과한 것 같다니까요.”

     현기가 말했다.

     “피카소가 사인한 수표가 그 수표의 금액보다 훨씬 더 비싼 것처럼 말이죠.”

     희진이가 말했다. 희진이는 이 일화를 좋아해서 비슷한 얘기만 나오면 반드시 언급하곤 했다. 

     “그러고 보니 유명인의 사인을 받으면 액자를 해서 벽에 걸어놓기도 하잖아. 그럼 그거야말로 진짜 작품인 셈이네.”

     수연이가 웃으며 말했다. 이쯤 되자 접시에 남은 스프를 수저로 닥닥 긁어모으고 있던 나도 한마디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맛집 식당이야말로 최고의 미술 갤러리게?"

     내 농담에 모두 피식 웃었다. 마침 이 레스토랑 벽에도 몇 몇 연예인의 사인이 붙어 있는 걸 발견한 수연이는 더 크게 웃었다.

     "어쨌든 아무 사인이나 다 벽에 걸릴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현기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우리는 미소를 지었지만 다소 침울해졌다. 그렇다. 우리가 사인한 수표가 단 10원이라도 더 비싸질 일은 결코 없는 것이다.

     오래 전 장인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더럽히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 날 작가들이 작품으로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싶어하지 않는 건 사실이다. 심지어 성공한 자신의 작품 때문에 오히려 모욕감을 느끼고, 자신의 작품을 질투하고, 심지어 그것을 깎아내리고 평가절하 하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상황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점점 더 미묘해지는 것 같다. 이제는 되려 작가의 이름이야말로 작가로 자신을 더럽히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름은 성공한 작가 때문에 오히려 모욕감을 느끼고, 작가를 질투하고, 심지어 그를 깎아내리고 평가절하하는 듯 하다. 급기야 ‘아무개는 아무개다’라고 스스로 선언이라도 할 지경이다. 작가와도 작품과도 별 상관없이 그저 이름 스스로의 실존을, 이름의 정통성과 정당성과 현존을 주장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작가의 이름은 작가가 죽기도 전에 먼저, 작가가 만든 작품보다도 먼저 유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제 우리는 오직 이름들만을 보관하는 박물관을 새로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박물관을 찾아 온 사람들이, 솜씨 좋게 조각조각 이어 붙인 이름들을 하나하나 감상하면서 심오한 감명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아, 나도 세상에 이름을 남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수연이가 말했다. 나는 순간 발끈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가 깨끗이 비워낸 수프 접시를 옆으로 밀어놓으며 이의를 제기하려는 순간 마침 종업원이 음식이 담긴 수레를 밀며 우리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튀긴 고기에서 풍기는 따듯한 기름 냄새와 진한 소스 냄새를 맡으며 나는 즉시 다른 모든 시름을 잊어버렸다.







(계속)


                     

이전 03화 좀 더 순진하게 (33)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