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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Dec 15. 2023

좀 더 순진하게 (35)





      퇴근 후 나는 전철을 타고 원당역으로 향했다. 희진이와 함께 그녀의 중고차를 사러 가기 위해 일부러 일찍 퇴근하고 오는 길이었다. 밖에는 아침 일찍부터 시작한 비가 하루 종일 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오는 봄비에 전철역 바닥은 온통 흙탕물과 신발 자국으로 엉망이어서 나는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원당역에 도착해서 출구로 올라가보니 희진이가 차양 아래에서 종이컵에 든 커피를 마시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서 나오는 길인지 긴 머리는 단순하게 질끈 하나로 묶고 상아색 코트에 청바지를 입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희진아.”

      내가 얼른 목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주위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나보다 희진이에게 자연스럽게 눈길이 쏠렸다. 그들은 잠시 꿈꾸는 듯한 얼굴로, 마치 개인적인 위안이라도 받은 것처럼 너그러운 눈길로 희진이를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이런 경험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마다 나는 조금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희진이 옆에서 내가 더 초라해 보이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저렇게 예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희진이를 볼 때마다 짐짓 의기양양해지는 게 사실이었다. 누가 뭐래도 예쁘다는 건 우월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부정할 순 있어도 거부할 순 없다. 아름다움은 윤활유와 같아서 특별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세상과의 접촉을 매끄럽고 심도 깊게 만들어준다. 그러니 상대방이 단지 예쁘다는 사실만으로도 친구나 연인이 될 이유는 충분한 것이다. 

      흙탕물을 피해가며 빗속을 10여 분 정도 걸어서 우리는 ‘중고차 세상’이라는 간판이 탑처럼 높게 세워진 중고차 가게에 도착했다. 가구가 거의 없는 썰렁한 사무실에서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컴퓨터로 고스톱을 치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서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장한 몸집에 거뭇한 턱수염 하며 와이셔츠 안에 금목걸이까지 차고 있어서 미국 영화 속에 나오는 건달 같은 모습이었지만 의외로 목소리는 부드럽고 친절했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일이시죠?”

      “예, 저는 이희진이라고 하는데요. 혹시 김석구 씨 되세요?”

      “어이구, 안녕하십니까.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야, 미인이시라고 하더니 정말 미인이시네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네, 저도 말씀 많이 들었어요.”

      차는 바로 타고 가실 수 있게 준비해 놓았습니다. 종철이 형이 특별히 부탁하신 거라 제가 신경을 많이 썼어요. 장담하는데 딱 믿으셔도 됩니다. 이런 물건은 쉽게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거의 새 차나 다름없어요. 자자, 백 마디 말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바로 차를 보러 가시죠. 이리로 따라오세요.”

      그는 우리를 밖으로 안내하며 앞장섰다. 나는 그 틈에 희진이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종철이라는 사람이 누구야?”

      “아, 우리 레스토랑 사장님. 사장님이 여기 소개시켜주셨거든.”

      그러고 보니 예전에 희진이가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사장이라는 사람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30대 후반쯤, 혹은 40대 초반쯤의 호리호리하게 마른 키 큰 남자로 척 보기에도 부티가 흐르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지성과 교양까지 갖추고서 이 세상에는 함정은 고사하고 돌부리조차 없다는 듯 뻔뻔하면서도 여유 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사장과 이렇게 화목하게 지내다니, 편집장과의 관계조차 껄끄러운 나로서는 부러운 일이었다.

      남자는 파란색 아크릴 지붕이 회랑처럼 쳐져 있는 사무실 벽을 돌아 뒤쪽 주차장으로 향했다. 잘게 바스러뜨려 놓은 회색빛 돌조각이 빽빽이 깔려 있는 널찍한 공터에는 가지각색의 수많은 종류의 차들이 줄을 맞추어 가지런히 주차되어 있었다. 비가 내리는 어둠 속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수백 대의 차들은 엄숙하다 못해 장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자는 그곳을 지나쳐 곧바로 주차장 앞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거기에는 검은색 투스카니가 지붕을 쳐 놓은 구조물 아래에 따로 주차되어 있었다. 그는 널찍한 앞 범퍼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술술 설명을 늘어놓았다. 

      “역시 검은색이 제일 무난하죠? 외장만 보면 새 차구나 하실 겁니다. 무사고 차량이고 2년에 3만 킬로 조금 넘게 뛰었습니다. 그 정도면 굉장히 양호한 거죠. 1년에 2만 내외로 뛴 거니까. 상태도 몇 번이나 점검해보고 안도 다 들여다봤는데 깨끗합니다. 전혀 걱정하실 게 없어요.”

     투스카니는 차량 전체에 검푸른 광채가 돌았고 흠집 하나 없이 미끈했다. 날씬하고 당당한 몸체, 선팅을 해서 거울처럼 번쩍이는 유리창, 두툼한 헤드라이트와 네 바퀴의 날렵한 은색 휠까지, 그의 말대로 조금도 나무랄 데가 없어 보였다. 공장에서 찍어낸 수백만 대 중 한 대의 공산품이 아니라 장인의 손으로 직접 두드리고 광을 낸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남자는 차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는 힘차면서도 부드러웠다. 계기판에 새파랗게 야광 색 불이 들어오고 양쪽 헤드라이트까지 켜지자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건강해 보였다. 희진이도 무척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녀가 아무런 트집도 잡지 않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사무실로 돌아가 서류에 사인을 했다. 남자는 차 열쇠를 희진이의 손에 건네주며 또 한 번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종철이 형 봐서 특별히 밑지고 파는 겁니다. 진짜에요. 제 친동생이 와도 이 가격으론 어림없어요. 나중에 형님하고 꼭 같이 한턱 쏘셔야 돼요. 형한테 말씀 좀 잘해주시고요. 그럼, 조심해서 안전 운전하세요. 필요한 일 있으시면 언제라도 좋으니까 부담 없이 전화 주세요.”

      희진이와 나는 남자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한달음에 차로 달려갔다. 다행히 계약을 한 후에도 차는 여전히 말끔해 보였다. 우리는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이 차 주위를 두어 바퀴 돌면서 감탄사를 연발하고는 문을 열고 앞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반질반질한 계기판과 핸들, 환풍구, 라디오, 내비게이션, 기어 옆에 표시되어 있는 하얀색 알파벳까지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얼마가 됐든지 간에 돈만 주면 이런 멋진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 차 몰고 종로 쪽으로 가볼까.” 

      희진이가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이 시간에 드라이브를 하러 시내로 나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서울 도심은 밤 12시 이후가 아니라면 언제나 붐볐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사 시속 20킬로미터로 가야 할지라도 이런 차는 도시 한가운데 있어야 폼이 나는 게 사실이었고 특히 밤에는 더욱 그랬다. 희진이는 시동을 걸고 조심스럽게 액셀을 밟았다. 차는 깜짝 놀랄 정도로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외마디 탄성을 질렀다. 희진이는 고향에서 늘 부모님 차를 몰고 다녔기 때문에 운전에 자신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긴장이 되는지 목을 꼿꼿이 세우고 경주마처럼 앞만 바라보았다. 나는 그 모습에 자꾸 웃음이 나왔는데 희진이는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서울 시내로 들어서자 역시 차들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비까지 오고 있어서 평소보다 더 정체가 심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차 안에서는 모든 게 완벽했다. 차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와 라디오 음악 소리가 뒤섞이면서 우리를 더욱 들뜨게 했다. 우리는 리듬에 맞추어 몸까지 가볍게 흔들었다. 안락하고, 자유롭고, 신이 나서, 꽤나 멋진 인생이라도 된 것 같았다. 차가 빨리 달릴 때면 나는 창밖으로 손을 뻗어보기도 했다. 차가운 빗방울에 젖은 공기가 손안에 가득 잡혀서 자꾸 주먹을 쥐어보았다. 그러다가 지극히 낭만적인 모험심에 사로잡혀 이대로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는 모든 것들과, 모든 관계와, 모든 진부한 감상들을 버리고, 이곳에 남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혹은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한 번쯤은 무작정 떠나보아도 좋지 않을까? 물론 희진이라면 분명 고개를 가로 젓겠지만. 

      그때 희진이가 사거리에서 끼익 소리를 내며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나는 몸이 크게 앞뒤로 휘청거렸다. 

      “아아, 갑자기 신호가 바뀌는 바람에. 미안해.”

      희진이는 뭐가 우스운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따라 웃었다. 딱히 우스울 게 없는데도 그냥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몸을 뻗어 희진이의 입에 가볍게 키스했다. 

      “뭐야, 갑자기. 무슨 영화라도 찍는 거야?”

      그러고 보니 그런 흉내를 낸 것도 같았다. 

      “그냥, 재미있잖아.”

      내 말에 희진이는 생긋이 웃었다. 그것은 달콤한 사탕처럼 입안에 가득 넣고 굴리고 싶은 미소였다.

      “오늘 너희 집에 가서 맥주나 한잔 할까? 축하 파티를 해야지.”

      나는 신이 나서 외쳤다.

      “아, 그러면 좋겠지만, 미안, 안 되겠는데. 레스토랑에 가봐야 해. 오늘 해야할 일이 있어서."

      “어, 그래?”

      나는 어리둥절한 나머지 다소 충격을 받았다. 오늘 저녁은 당연히 둘이서 함께 자축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치 이 차가 ‘우리’의 차이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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