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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Dec 27. 2023

좀 더 순진하게 (36)





     “미안해. 미리 말을 못했네. 다음에 꼭 한 턱 크게 낼게.”

     엑스트라는 분량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 진행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엑스트라인 것이다.

     "그래도 이 근처에서 간단하게 뭐라도 좀 먹을까?”

     희진이가 말했다.  

     “괜찮아. 괜히 마음만 급하지 뭐. 그냥 여기 전철역 앞에 내려줘.”

     “집까지 데려다 줄게. 차 있어서 좋다는 게 뭐야.”

     “아니야. 여기까지 온 김에 수연이나 만나고 가지 뭐.”

     “수연이?”

     “조만간 한 번 놀러오라고 했거든.”

     “아, 그러지 말고 이번 주말에 나하고 같이 가자. 수연이한테 차도 보여줄 겸. 다 같이 어디 야외로 드라이브 가도 좋고.”

     “뭐, 그것도 좋겠네. 그런데 오늘은 그냥 나 혼자 갈게. 비도 오는 데 수연이랑 술이나 한 잔 하지 뭐.”

     나는 딱 잘라서 말했다. 희진이도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쏟아지는 비에 대해 몇 마디 언급했을 뿐이었다.  

     이윽고 차는 을지로 역 앞에 섰다. 나는 기세 좋게 벌컥 차문을 열고 거리로 나왔다. 그러나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축축한 냉기와 소란 때문에 곧바로 주눅이 들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신선한 공기로 폐를 가득 채웠다. 그래, 나는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이지. 가끔씩 그것을 잊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러나 곧이어 나는 역시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퍼뜩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나는 금세 머리카락을 적시기 시작한 빗줄기를 피해 우산을 펼쳐들었다.

     “오늘 고마웠어. 전화할게.”

     희진이는 창문을 내리고 소리치더니 빗줄기 속으로 빠르게 미끄러지며 사라졌다. 나는 우산을 들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빗줄기가 제법 세차게 우산을 내리쳤고 금세 발목까지 비에 젖었다.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흠뻑 젖은 우산 밑에서 고개를 수그린 채 각자의 침묵을 더듬으며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굳이 일일이 묘사해 보일 것도 없이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옷차림을 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 심드렁한 표정들 속에 무슨 특출난 행복이나 불행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고만고만한 기쁨과 고민과 의지와 실망과 피로들로 얽어진 삶들.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내기에 기막히게 적당한 사람들. 나는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저들과 딱히 다를 것이 없었다. 고만고만한 기쁨과 고민과 의지와 실망과 피로들.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친 우리들인데도 상자 안에 담긴 한 세트처럼 비슷비슷하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천재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장식 선반 위에 죽 늘어놓고 진열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불현듯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창준 선배를 떠올렸다. 그는 여전히 색다르고 괴상하게 살고 있을까? 그 누구와도 다르게? 전혀 통속적이지 않게? 만약 그때 창준 선배의 고백을 받아들였었다면 지금쯤 나의 삶도 별난 모험으로 가득 차게 되었을까? 이 사람들과는 다른 상자 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나는 핸드폰을 꺼내 수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말 수연이를 만나러 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다. 오늘 밤 수연이와 보란 듯이 재미있게 지내겠다는 다소 치졸한 오기가 생겼다. 하지만 수연이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나는 다시 수연이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현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김민주예요. 수연이가 핸드폰을 안 받아서 집으로 전화해봤어요. 수연이 있나요?”

     “아, 예에, 안녕하세요. 수연이는 지금 집에 없어요. 배터리가 없어서 전화기 꺼놓는다고 했으니까 지금은 통화가 안 될 거예요. 용건 있으시면 전해드릴까요?”

     “아니에요. 근처에 왔다가 그냥 얼굴이나 보고 갈까 해서 연락해 봤어요. 오면 저한테 전화 왔었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전화를 끊으려는데 현기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저기, 민주 씨.”

     “예?”

     “조금 있으면 수연이 돌아올 텐데, 집에 와서 기다리실래요?”

     “네?”

     “그리고 실은 제가 좀 여쭤볼 게 있었거든요. 오셔서 기다리는 동안 저하고 차 한잔 해요.”

     나는 잠시 입을 우물거렸다. 좀 겸연쩍은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또 한편으로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수연이와 더 가까워지려면 현기와도 친해지는 편이 좋았다.

     “예, 그럴까요? 그럼 제가 지금 댁으로 갈게요.”

     나는 애써 명랑하게 대답했다.

     전철을 타고 왕십리역에 내렸을 때는 비가 더욱 거세게 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 내내 내릴  기세였다. 나는 우산을 받쳐 들고 부지런히 골목길을 걸어갔다. 금세 무릎 위까지 스타킹이 흠뻑 젖었다. 나는 근처 슈퍼마켓에 들러 맥주 여섯 병과 감 한 바구니를 사 들고 희진이의 아파트로 뛰어 들어갔다. 벨을 누르자 안에서 현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아, 네, 저예요.”

     곧바로 문이 열리더니 현기가 쑥 몸을 내밀었다. 

     “오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밖에 비가 많이 오죠? 들어오세요.”

     현기는 내 손에서 봉투를 받아 들며 길을 비켜주었다. 비 오는 날의 실내가 보통 그렇듯 집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이삿짐이 여기저기 쌓여 있던 예전과는 다르게 거실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안방과 작은방의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나는 현기가 맥주와 감을 냉장고에 넣기 위해 부엌으로 간 틈을 타서 푹 젖은 스타킹을 벗었다. 축축한 맨살이 드러나자 선뜩하게 느껴졌다.

     “식사 안 하셨죠?” 

     현기가 불쑥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얼른 두 다리를 치마 밑으로 당기고는 젖은 스타킹을 핸드백 안에 쑤셔 넣었다. 

     “예, 아직 안 했기는 한데.”

     “수연이는 안성에 있는 사촌동생을 만나러 갔어요. 같이 쇼핑할 게 있다구요.  7시까지 온다고 했는데 좀 늦어지네요. 출출한데 일단 우리끼리 뭐라도 좀 간단하게 먹죠. 볶음밥 괜찮죠?”

     현기는 내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벌써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고 있었다. 나는 현기가 볶음밥을 만드는 동안 거실 소파에 앉아 맨 다리를 서로 비비며 멀뚱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실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과 그 빗물 위로 번지는 불빛들 뿐이었다. 어디선가 쇠붙이 위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족이나 친척 외의 남자와 집 안에 단둘이 있어본 건 처음이었다. 나이 스물아홉에 남자와 단둘이 한 집에 있는 게 처음이라니, 그것도 참 우습고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현기가 두 사람 분의 식사가 차려진 작은 밥상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볶음밥은 냉동 인스턴트 제품이었지만 반찬 몇 가지와 함께 상차림은 깔끔했다. 나는 수연이가 언제 돌아오는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촌스러운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식사를 마치기 전에는 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꾸역꾸역 밥을 다 먹고 상을 치울 때까지도 수연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부엌에서 나온 현기는 내게 따듯한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내밀었다. 자신의 컵은 없었다.

     “저기 실은, 민주 씨에게 도움을 좀 받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현기가 맞은 편 소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예, 무슨 일이신데요?”

     “다른 건 아니고요, 에, 사실은, 웃으실지도 모르지만, 제가 시를 쓰거든요.”

     "뭘 하신다구요?"

     "시요. 시를 쓴다구요."

     “시요?”

     “별건 아니에요. 자작시를 올리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는데 거기에 시를 올리고 있거든요. 뭐 그래도 사이트는 제법 규모가 있는 곳이에요. 회원 중에는 등단한 시인들도 있구요.”

     현기가 시를 쓴다니 꽤나 의외였다. 비좁은 느낌을 주는 이 남자가 대체 어떤 시를 쓴다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래도 대단하시네요. 따로 시간을 내서 창작 활동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우주 물리학이니 양자역학이니, 뭐, 그런 걸 공부해야 하는 세상인데 시를 쓴다니, 사실 좀 창피하긴 해요. 어떻게 보면 유치하달까, 어른스럽지 못하달까. 그래도 사람은 각자 수준과 취향이 있는 거니까요. 뭐, 요새 만화 피규어 모으는 사람도 있고, 신발 리폼하는 사람도 있고, 손으로 자수 놓는 사람도 있고, 옛날 게임팩을 모으기도 하고, 수족관을 꾸미거나 식물을 키우는 사람도 있잖아요.”

     “아니요, 저는 오히려 이런 시대일수록 시를 쓰는 게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주 물리학이나 양자역학이 우주의 비밀을 밝힐 수는 있어도 그게 사람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내 아첨에 현기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의 비위를 맞추는 건 정말 쉬운 일이었다. 현기가 힘주어 말했다.

     "그건 맞아요. 시는 힐링이잖아요.”

     이런, 나는 그만 역겨워졌다. 시가 구닥다리인 건 사실이다. 그리고 구닥다리인 것들에게는 소위 힐링 효과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는 힐링이 아니다. 예술은  사람을 힐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차라리 진통제나 마취제, 환각제라고 한다면 더 그럴 듯 하겠지만 그 마저도 결코 치유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 날에는 오직 그것만이 예술이 연명하는 유일한 목숨줄이 되어버린 듯 하다. 아니, 오히려 예술 스스로 더 만족해 하는 듯 하다. 간신히 숨을 돌리는 듯 하다. 어렸을 때 잃어버린 고향이라도 찾은 듯 하다. 그래, 예술도 근 이 백년 동안 너무 치열하게 살았지. 노출과 관음, 폭식과 거식, 낙태와 자살을 반복했지. 예술 자신이야 말로 위로와 치유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역겹게 하는 건 예술이 처방전에 적힌 목록 중 하나가, 혹은 처방전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예술은 이제는 처방전 조차 필요하지 않은, 동네 편의점에서 파는 비타민제나 강장제 정도에 불과해진지 오래다. 신 다음에 예술이 죽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고, 이제 예술은 자신의 처지와 분수에 적응해 가고 있는 것 뿐이다. 정말 내 비위를 상하게 하는 건 다름아니라 이 '힐링'이라는 단어 자체다. 언제부터인가 어느 곳에서나 누구에게든  만능 키처럼 통하는 이 '힐링'이라는 단어는 벌써 너덜너덜한 걸레가 되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것을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서 빤스춤을 춘다. 마치 지극히 별 볼일 없는 자기 자신의 지극히 별 볼일 없는 하자와 결핍을 지극히 별 볼일 없이 힐링하는 것이 어떤 대단한 역사적 사명이나 문화적 사조나 시대정신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공식적인 자아도취에 실패한 자아 과잉 소시민들의 하찮은 것에 대한 병적인 의미부여.  자기 위안이라는 뻔뻔한 미세 먼지로 뿌옇게 흐려진 이 세상이 내 속을 뒤집어 놓는다.

     “저기, 여쭤보고 싶은 건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저희 사이트에서 합동 시집을 내려고 하거든요. 그냥 기념도 되고 서로 교류도 하는 의미로 일 년에 두 번씩 문예지처럼 만들까 해요. 마침 민주 씨가 출판사에 있으시니까 조언을 좀 구하고 싶어서요. 저, 보통 비용 같은 건 어떻게 될까요?”

     “비용이 딱 정해져 있는 건 아니에요. 종이 재질이나 표지 형식, 몇 부를 찍어내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져요. 적게 찍어낼수록 상대적으로 비싸죠. 기본 값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정확한 비용을 알아보시려면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상담을 받아보셔야 돼요.”

     “혹시 민주 씨네 출판사에서도 가능할까요?”

     “너무 부수가 적으면 안 돼요. 최소 1500부에서 2000부 정도는 생각하셔야 돼요. 부수만 맞으면 저희 출판사에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죠. 더구나 1년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문예지를 내신다고 하면 저희 출판사도 좋은 조건으로 해드릴 거예요. 편집 쪽은 제가 능력이 되는 데까지 도와드릴 수 있고요. 한번 오셔서 정확하게 상담을 받아보세요. 제가 최대한 빨리 담당자하고 약속을 잡아드릴게요. 위에다 말도 잘 해놓구요. 아무래도 제가 있으니까 다른 데서 하시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로 나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이제 마음이 놓이네요. 앞으로 잘 좀 부탁드릴게요.”

     현기는 어깨라도 두드려주고 싶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딱히 불쾌한 침묵은 아니었다. 현기가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안방에서 두툼한 종이 뭉치를 가지고 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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