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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an 05. 2024

좀 더 순진하게 (37)




      “저기, 이거, 제 시인데요, 집에 가져가셔서 한번 읽어봐 주실래요?”

      “아니, 전 시를 잘 몰라요.”

      “괜찮아요. 온라인에서만 소통하다 보니까 온라인 밖에서도 감상을 들어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냥 부담 없이 읽어보고 솔직하게 말해주시면 돼요.” 

      갑작스러운 현기의 부탁에 나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의 시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일종의 무례였다. 불시에 솔직함을 강요받는다는 건 거짓말을 강요받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이미 내 턱 밑에 바짝 들이 밀어진 종이 뭉치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하는 수 없이 그것을 받아 들고 손이 가는 대로 펼쳐 들었다.     


나의 열 손가락은 열 개의 날개

키보드 위로 끊임없이 추락하는 이카로스

탄식의 날갯짓에 우주가 열리면

태양을 향해 활자들은 혜성처럼 날아가고 

시공을 초월하여 행과 행을 나누다가

블랙홀 너머에서 유성처럼 거꾸러지는 환희 

문득 태초로 돌아가고 싶어질 때면 

가만히 delete 키를 누르는 나는

영원의 바다 속으로 녹아내리는

한 덩어리의 뜨거운 데이터     


      시는 형편없었다. 솔직히 말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카로스니, 블랙홀이니, 태초니, 영원의 바다니, 소위 값지게 보이려고 일부러 찍어 바른 듯한 단어들이 무엇보다 눈에 거슬렸다. 제대로 숨기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뽐내지도 못한 자의식은 똥 싼 바지처럼 엉거주춤하게 행간 위로 늘어져 있었다. 이 시의 목적은 단지 ‘최대한 시처럼 보이는 것’뿐인 듯했다. 

      “저,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나는 먹이를 기다리는 개처럼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현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감성이 참 풍부하신 것 같아요.”

      “그래요?”

      현기의 퉁퉁한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상징들이 독특하고, 표현도 강렬하네요. 현대적이기도 하고요.”

      그리고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서둘러 말을 돌렸다.

      “집에 가서 잘 읽어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네네, 정말 감사합니다. 나중에 제가 제대로 한 턱 쏘겠습니다.” 

      “현기 씨는 어떤 시인을 제일 좋아하세요?”

      “저는 오웬을 좋아해요. 영국 시인인데, 혹시 아세요?”

      “모르겠는데요.”

      “꼭 한 번 읽어보세요. 그 사람 시는 신랄하고 가혹하고 또 무례한데, 흠, 그러니까 동상에 걸려 얼어터진 손끝에 맺혀 다시 그 손가락을 녹이는 뜨거운 피 같거든요. 대학교 3학년 때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읽게 됐는데, 언젠가는 나도 꼭 그런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게 참 쉽지가 않네요. 솔직히 말해서 보시다시피 이런 평범하고 시들한 일상에서 어떻게 멋진 시가 나올 수 있겠어요?” 

      그는 재빨리 머리 위로 눈동자를 굴리더니 말을 이었다.

      “무언가 확실한 계기가 있으면 도움이 될 텐데 말입니다.”

      “뭐, 예를 들면, 사랑 같은 거요?”

      내가 건성으로 물었다. 비유와 과장과 비겁의 결정체인 시에 걸맞은 소재는 얼른 사랑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뇨. 제 말은, 전쟁 같은 거요. 오웬도 원래 낭만주의 시를 쓰는 삼류 시인에 불과했는데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훌륭한 시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거든요.” 

      그러면서 그는 “그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축복이나 하려는 듯 두 손을 쳐들었다. 그의 미소를 보고, 우리가 선 곳이 지옥임을 알았다. 낯선 친구, 여긴 슬퍼할 까닭이 없군” 어쩌고 하는 오웬의 시 구절을 읊어줬다. 

      “전쟁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이렇게 치열한 시를 쓸 수 없었을 겁니다. 결국 전쟁터에서 젊은 나이에 죽긴 했지만 시인으로서는 행운아였던 셈이에요. 그에 반해 오늘 날 시인들은 더 적게 쓰고 더 오래 살죠. 뭐, 북한이 남한에 핵이라도 몇 방 날려주면 또 모를까.” 

      그는 오웬의 시를 동경하기보다는 오웬의 삶을 시기하는 것 같았다. 그 시들을 쓴 건 실은 오웬이 아니라 전쟁인데, 오웬이 그 분에 넘치는 영광을 모조리 가로챘다는 식이었다. 자신이 오웬이었다면 자신도 그런 시를 쓸 수 있었을 거라는, 지극히 정언적이지만 지극히 언어도단적인, 자격자심과 자아과잉의 황홀한 교접. 그는 그밖에도 시와 시인에 대한 여러 가지 잡다한 의견들을 열정적으로 늘어놓았다. 누군가와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게 마냥 기쁜 모양이었다. 하긴 그의 주변에는 잘릴 염려가 없는 공무원인 게 마냥 안심인 동료 교사들과, 세상 전체보다도 당장의 자기 발밑이 가장 막막한 10대 아이들, 그리고 수연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현기는 오직 자신만이 고독하게 고뇌하는 괴짜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실은 고독하게 고뇌하는 흔한 괴짜들 속의 또 한 명의 흔한 괴짜일 뿐인데.

      현기가 산문시에 대해 장장 20분이나 비판을 늘어놓고 있을 때, 집 전화가 요란한 소리로 울렸다. 

      “여보세요. 어, 그래, 어디야? 아직도? 아, 민주 씨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니, 전화가 왔길래 내가 오시라고 했어. 난 네가 금방 올 줄 알았지. 뭐? 어, 아냐. 알았어. 그래. 알았다니까. 잠깐만.”

      현기가 수화기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민주 씨, 미안한데, 오늘 수연이가 못 돌아온다고 하네요.” 

      “네?”

      “비가 많이 와서 그냥 거기서 자고 오겠대요.”

      “아, 그래요?”

      나는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아, 민주야, 미안해. 네가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 가는 건데 그랬네.”

      “괜찮아. 내가 갑자기 온 건데, 뭐. 근처에 왔다가 얼굴이나 보고 갈까 했지.”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비가 오길래.”

      나는 갑자기 수연이가 몹시도 그리워졌다.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미안. 우리 며칠 있다가 다시 만나자, 응?”

      “그래, 알았어. 다음에 보자.”

      전화가 끊어지자 나는 차라리 홀가분해졌다. 

      “저기,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헛걸음만 하셨네요.”

      내가 건네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현기가 말했다.

      “아니에요. 덕분에 저녁도 잘 먹었는데요.”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옷매무새를 챙기며 대답했다.

      “저기요, 그러지 말고 맥주 한잔 하고 가실래요?”

      “네?”

      “아직 비가 너무 많이 오잖아요.” 

      나는 말없이 웃었다. 비가 많이 오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한잔만 하고 가세요. 사 오신 맥주가 냉장고에 그대로 있는데, 한잔은 하고 가셔야죠.”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 이상 머무르는 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꽤나 어색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맥주 한잔 하자는 것뿐인데 무슨 숫기 없는 처녀애처럼 슬슬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한잔만 하고 갈게요.”

      현기는 반색을 하며 부엌으로 달려갔다. 나는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현기의 시들 중 하나를 펼쳐 보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11시.

오늘 하루도 헛되이 보내리라는 걸

나는 단박에 알았다.

그래서 헛되이 보내기로 결심했다.   

    

      내가 다음 연을 미처 읽기도 전에 현기가 술상을 차려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상에는 맥주 세 병과 유리컵 두 개, 조각조각 잘린 감, 커피맛 땅콩, 노릇하게 구운 쥐포가 가지런히 접시에 담겨 있었다. 그 단정한 상차림에 나는 기분이 누그러졌다. 술상을 가운데 놓고 바닥에 앉자마자 현기가 두 잔 가득 맥주를 따랐다. 우리는 단번에 맥주 한잔씩을 다 비웠다. 그리고 그때 부터는 각자가 자신의 잔에 맥주를 채워가며 편하게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들어가자 현기는 말이 더 많아졌다. 다행히 시에 대한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얘기, 군대 취사병으로 있을 때 얘기, 그리고 수연이에 대한 얘기가 이어졌다.

      “그러니까 제대하고 나서, 다음 해 여름이던가, 수연이를 만났어요. 수연이하고는,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후배 소개로 만났어요. 수연이 고등학교 때 친구가 저희 과 후배였거든요. 실은 이건 비밀인데 제가 그 후배한테 관심이 좀 있었어요. 그런데 어물어물하다가 수연이를 소개받은 거예요. 처음 수연이를 봤을 때는 사실 별다른 느낌이 없었어요. 그냥 물에 물 탄 것처럼 밍밍한 거 있잖아요. 수연이가 말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재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외모가 눈에 확 띄게 예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취미가 비슷하거나 말이 통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솔직히 좀 시시하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다음 약속도 잡지 않고 헤어지고 왔는데, 며칠 있다가 갑자기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왜 그랬는지는 저도 모르죠. 인연이었는지 어땠는지, 이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어땠는지. 뭐, 흔한 얘기죠. 그렇게 만나기 시작한지도 벌써, 3년이 넘었네요.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 길게 갈 거라고는, 더구나 이렇게 같이 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사람 일이라는 게 참 알 수가 없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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