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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an 11. 2024

좀 더 순진하게 (38)





      곧이어 현기는 자신의 학생들을 ‘악마 새끼들’이라고 지칭해가며 교직의 고충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았고, 나도 질세라 편집장에 대한 험담을 신나게 떠벌렸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술을 많이 마셨다. 내가 사 온 맥주가 다 떨어지자 현기가 집에 있던 양주를 꺼내 왔다. 한 번은 내가 물을 떠 오려고 일어나다가 주저앉는 바람에 둘이 낄낄거리며 웃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등 뒤에 있던 소파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제야 창밖의 빗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아, 아직도 비가 오고 있구나. 현기가 계속 뭐라고 떠들어댔지만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현기도 상을 옆으로 밀어놓고 벌렁 누워버렸다. 나는, 아마도 우리는, 비 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대로 잠들어버리고 싶을 만큼 빗소리는 은근하고 부드러웠다. 슬쩍 옆을 보니 어느새 잠 들었는지 현기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가슴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는 깍지 낀 두 손과 포동포동한 턱을 힐끗거리며 쳐다보았다. 알고 보면 꽤 예민하고 서늘한 그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미련해 보이는 건 순전히 통통한 살집 때문이었다. 만약 살이 찌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호감 가는 인상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의 목젖에 어느새 눈길이 쏠렸다. 남자와 여자는 성기의 모양과 가슴의 크기만 다를 뿐, 눈 두 개, 코 하나, 팔다리 두 개씩이 달린 똑같은 사람들인 것 같다가도, 목젖이나 손가락 뼈마디, 발등에 난 털같이 세부적이고 사소한 것들에서는 오히려 근본부터 완전히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현기가 얕은 기침을 하는 바람에 나는 재빨리 천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괜히 눈동자를 두리번거리다가 텔레비전 위에 걸려 있는 현기와 수연이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사진 속의 두 사람은 박물관에서 보았던 풀색 파카를 나란히 입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제까지 현기와 수연이가 저 사진 속의 모습처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막상 수연이와 현기를 따로 때어놓고 보면 그들이 정말 잘 어울리는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성격도, 취향도, 외모도,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전혀 닮은 데가 없었다. 게다가,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심지어 성(性)도 달랐다. 이토록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 걸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공통점이 두 사람을 연결시키고 있는 걸까? 아니면 오직 차이점만으로 두 사람은 연결되어 있을까? 나는 다시 현기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갑자기 현기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이미 모른 척 하기도 늦었고 또 귀찮기도 해서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것은 술기운 때문이었다. 현기는 왜 쳐다보냐는 듯 멀뚱한 표정이었고 내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현기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맨살이 드러난 내 다리를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왜 스타킹을 벗었지?”

      현기가 중얼거리며 엄지손가락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너무 이상해서 꿈속처럼 놀라는 것마저 잊을 지경이었다. 그는 수연이의 남자 친구였고 우리는 고작 세 번 만났을 뿐이었다.  나는 얼떨떨하면서도 조금 뭉클한 기분을 느끼며 내 무릎을 만지고 있는 현기의 검은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현기는 내 두 다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내 치마에 자신의 입술을 부볐다. 나는 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그의 뻣뻣한 입술이 내 입술과 혀끝에 닿았다. 희진이 외에는 처음 닿는 다른 사람의 입술이었다. 희진이의 감촉과는 너무 달라서 나는 그만 고개를 돌릴 뻔했지만 그의 손아귀가 내 얼굴을 덮쳤다. 우리는 꾸역꾸역 키스를 했다. 이것이 어떤 목적이 있는 행동일까? 아니면 분명한 동기라도 있는 걸까? 욕망일까? 그렇다면 욕망이란 원래 이리도 푸석푸석한 것일까? 

      내가 숨을 내쉬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현기는 내 등에 손을 두르고 위로 올라갔다. 아래서 올려다본 현기의 몸은 놀랄 정도로 크고 넓어서 나를 온통 뒤덮은 것만 같았다. 그제야 나는 이 상황이 겨우 실감이 됐다. 하지만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감이 있었고 딱히 거스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현기는 내 윗도리 단추를 풀고 젖가슴에 얼굴을 거칠게 문질러대더니 곧바로 치마 속에 손을 넣어 팬티를 끌어 내렸다. 현기는 매우 서두르고 있었다. 내 옷을 모두 벗기지도 않고, 또 자신도 벗지 않은 채 그냥 해버릴 모양이었다. 우리는 좀도둑질을 하듯 서툴고 성급하게 서로를 끌어당겼다. 현기는 한 손으로 바지 단추와 지퍼를 풀어 내리고 자신의 성기를 꺼냈다. 그의 축축한 성기가 내 무릎에 닿자 나는 나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며 부르르 떨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내 치맛단 사이로 현기의 것이 솟아올라 있었다. 포르노 사진이나 동영상에서 수없이 보아온 것이었지만 꼿꼿하고 길쭉한 모양새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할 틈도 없이 현기가 내 양 다리를 잡고서 자신의 성기를 들이밀었다. 단단한 것이 내 몸속으로 조금 들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끙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현기가 내 팔을 잡아 누르고 있어서 단지 몸을 들썩이며 양 다리를 더 벌렸을 뿐이었다. 그가 다시 한 번 더 힘을 주자 이번에는 성기가 반 정도 들어왔다. 그는 몸을 비틀더니 내 왼쪽 다리에 기대어 성급하게 몸을 앞뒤로 움직여댔다. 그의 허벅지가 내 허벅지에 철썩철썩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참으로 볼품없고 둔탁한 행위였다. 그저 두 개의 부딪히는 육체만 있다면 아무런 불만도 없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턱턱 힘차게 부딪혀 오는 묵직한 몸뚱어리의 단조로운 압박이 점점 나를 흥분시켰다. 평소 섬세한 간지러움이나 다정한 애무를 좋아했었는데, 이런 막무가내식의 밀어붙임도 충분히 만족스럽다니, 쾌락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점차 빠른 속도로 밀어붙이던 현기는 갑자기 몸을 치켜들고 깊이 찔러 넣었다. 이를 악문 신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체가 대여섯 번 더 앞뒤로 지분거리자 그의 커다란 엉덩이가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아직 충분히 고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그의 행동을 모두 보고 있다가 아랫배를 휘젓는 진득하고 불쾌한 느낌에 얼굴을 구겼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얼떨떨했지만 곧 그것이 남자들의 ‘사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잠시 몸서리를 치더니 물컹한 느낌과 함께 순식간에 내 몸에서 빠져나가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가쁜 숨을 들이쉬느라 현기의 어깨가 들썩였다. 나는 구겨진 것처럼 늘어져 있는 그의 성기를 잠깐 훔쳐본 뒤 발끝에 돌돌 말려 있는 팬티를 주워 들고 태연하게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화장실 문을 잠그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몸을 떨었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 3분, 5분? 아무리 길어도 10분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다시 이렇게 화장실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마치 거대한 데자뷰인 것 같아 웃음이 흘러나왔다. 일단 따듯한 물에 샤워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랑이 사이가 축축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고 달아올랐던 몸에도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하지만 옷을 다 벗고 샤워기를 틀었을 때 나는 따듯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보일러가 꺼져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찬물을 얼굴과 팔에 끼얹고 가랑이 사이를 조심스럽게 닦아 내려갔다. 물이 너무 차서 무릎이 와들와들 떨렸다. 사타구니 안쪽까지 손가락을 넣어 구석구석 씻어내다가 불현듯 방금 전 콘돔을 사용했어야 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 순간 내 목구멍에서 괴상한 신음 소리가 끓어올랐다. 콘돔의 필요성을 생각해본 건 평생 처음이었다. 이제까지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메스꺼움을 느끼며 가래침을 퉤 뱉었다. 

      “씨발.”

      갑자기 욕이 버럭 튀어나왔다. 나 역시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혹시 밖에서 현기가 듣지 않았을까 귀를 기울였지만 문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어진 일은 명백했다. 고작 한 문장, 아니 한 단어면 충분할 만큼 말이다. 일단 이 집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서 빨리 내 집으로 돌아가서 혼자 천천히, 정말 천천히 이 모든 일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나는 옷을 입은 뒤 욕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소파 위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던 현기는 내가 나오자 어색하게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재빨리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오늘 일은 취해서,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니까 없었던 일로 해요. 서로 호들갑 떨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나는 소파에 놓여 있던 핸드백을 집어 들고 현관으로 성큼 걸어갔다. 현기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할 말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득이 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두컴컴한 층계를 내려가 아파트 현관에 서고 나서야 나는 아직도 비가 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비는 이제 잦아들어 조용조용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수연이네 집에 두고 온 우산에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 벨을 누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현관 구석에 쌓여 있던 전단지 중 한 장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큰길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장장 20분을 길거리에서 오들오들 떨며 기다린 후에야 겨우 택시를 잡아탈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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