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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an 19. 2024

좀 더 순진하게 (39)





      오랜만에 나는 편집장에게 불려가 거창하게 잔소리를 들었다. 내가 만든 표지 디자인이, 특히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색깔을 고른 것은 편집장 자신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의 기세에 눌려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편집장은 오후 내내 나를 닦달하다가 끝내 나와 함께 야근을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내일까지 틀림없이 해놓을 테니 댁으로 들어가시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진행 상황을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편집장과 함께 김밥으로 저녁을 때우고는 곧바로 일에 매달려야 했다. 편집장도 자신의 책상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자판을 두들겨댔다. 넓은 사무실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자판 소리 외에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나는 뒤통수가 뜨거워서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내가 표지 디자인을 하고 있는 ‘Kill Me in Love’란 제목의 소설은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연재되었던 로맨스물이었다. 작가는 ‘꽃고무신’이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었는데 그쪽 세계에서는 꽤 유명인인 모양이었다. 인터넷 소설들이 종이 책으로도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 이후, 우리 출판사도 20편이 넘는 인터넷 소설을 책으로 출간하고 있었다. 그중 반 이상이 로맨스물이었고 나머지는 스릴러와 판타지물이었다. 영화에서는 로맨스가 이미 한물간 장르였지만 출판업계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내가 표지를 만들었던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다는 가슴 시린 얘기는 내 비위에는 도통 맞지 않았다. 물론 사랑에는 일종의 장대함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시시덕거림을 넘어서서 터부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혁명적이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몸부림이다. 계급, 인종, 동성애, 이성애, 근친상간, 강간, 살인, 범죄, 외도, 신성모독, 변태 행위마저도 사랑 안에서는 손쉽게 아름다움과 설득력을 획득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실은, 그리고 결국, 저급하고 속된 것이다. 로맨스 소설이 저급하고 속된 것은 장르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특성이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랑은 터부의 경계를 뭉개기는커녕 슬그머니 터부에 스며들고자 하는 비겁함이며, 비루하고 무능력하고 열등감에 빠진 인간들이 가장 쉽게 자족할 수 있는 열정과 야망이기도 하다. 그 대중적인 허풍과 허영이 사랑을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마냥 부풀려놓은 덕에 사랑은 오늘날 가장 상업적인 사업 아이템이 되었다.

      “뭐, 이 정도면 된 것 같네.”

      내가 수정해 온 디자인을 본 편집장이 책상을 주먹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미 시간은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거창하게 한숨이라도 쉬고 싶은 심정으로 돌아서려는데 편집장이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런데 김민주 씨.”

      “네?”

      “듣자하니 아직 남자 친구가 없다던데.”

      편집장은 계속 책상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예.”

      “나이가 몇이더라?”

      “서른인데요.”

      “서른인데 왜 아직 남자 친구가 없어? 그래 가지고 연애는 언제 하고 시집은 언제 갈 거야? 또 애는 언제 낳으려고?”

      평소라면 이런 무례한 얘기도 가볍게 웃어넘겼겠지만, 상대가 상대인 데다가 한 밤중에 피곤한 사람을 세워놓고 할 질문은 아니어서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예, 그러게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래? 그럼 말이지, 사람 하나 만나 볼래?”

      “네?”

      “내 막내 동생 놈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한번 만나 보지.”

      나는 편집장이 나를 놀리는 건가 싶어서 얼떨떨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반백의 머리가 더 새하얗게 보였다.

      “한번 만나 봐. 서른여섯 살인데 일식 요리사야. 먹고 살 능력도 있는 놈이고 나처럼 성질이 더럽지도 않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너무 순해 빠져서 문제지.”

      “아니에요. 정말 감사하지만, 저는 생각이 없어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둘 다 아직 젊은데 허송세월해서 뭐해? 부담 갖지 말고 그냥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어봐. 만나보고 아니다 싶으면 마는 거지, 뭐. 그럼 질질 끌 것 없이 내일 저녁으로 약속 잡지. 동생한테는 시간 비워놓으라고 벌써 말해놨으니까 민주 씨만 오케이 하면 돼.”

      여러 번 거절했지만 편집장은 막무가내였다. 같은 얘기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이미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마지못해 약속을 하고 나서야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출판사를 나서자마자 곧바로 후회가 되었다. 나는 연애에 관심이 없었고 게다가 소개를 통해 억지로 짝을 맞추는 심드렁한 관계는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했다. 아니, 제일 곤란한 건 상대방이 편집장의 동생이라는 사실이었다. 만나보고 싫으면 그만이라고 편집장은 호언장담했지만, 막상 내 쪽에서 퇴짜를 놓았다가는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고달파질 게 뻔했다. 아무래도 내일 상대방에게 솔직히 사정을 털어놓고 편집장한테 잘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최선일 듯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엉뚱한 일로 생판 남에게 사정하게 생겼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나저나 편집장이 자신의 친동생을 소개시켜줄 정도로 나를 좋게 봤다는 건 정말이지 의외였다. 오히려 나를 미운털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말이다.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지만 편집장 입장에서 생각하면 제대로 헛다리를 짚은 셈이었다. 편집장으로서는 나와 희진이의 관계라든지 현기와의 사건 같은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주제에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지레짐작하면서 자신의 동생을 소개시켜주다니 우습다고 해야 할지,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참 얄궂은 일이었다.  

      다음 날 퇴근 후, 편집장의 무심한 척 짓궂은 눈길을 뒤로하고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 나는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 졌다. 처음에는 상대가 편집장의 동생이라는 일방적인 부담감 때문이었지만, 막상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다른 걱정이 앞섰다. 상대방이 첫눈에 내게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낯이 화끈거렸던 것이다. 동생을 설득하기 위해 편집장이 나를 얼마나 미화해 놓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희진이 같은 여자가 짠하고 나타난다면 어떤 남자라도 눈이 휘둥그레질 텐데 말이다.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유명 멜로드라마의 촬영 장소였다는 걸 광고하는 대형 현수막이 입구 옆에 걸려 있었다. 나는 들어가기에 앞서서 내 옷차림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희진이가 부추겨서 샀던 비즈 장식의 파란색 시폰 원피스에 평소 아껴두었던 베이지색 모직 코트를 차려입었다. 머리는 드라이로 살짝 구불거리게 풀어 내리고 화장도 오랜 시간 정성을 들였기 때문에 평소의 내 모습에 비하면 세 배쯤은 낫다고 할 수 있었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하얀색 투피스 제복을 입은 여자가 얼른 다가와 내 이름을 묻더니 안쪽 테이블로 나를 안내했다. 이런 서비스를 해주는 식당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주눅이 들었고 그래서 다소 불쾌해졌다. 특히 여자의 친절은 지나칠 정도였는데, 이런 서비스의 목적은 기분 좋을 만큼 친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날만큼 친절하게 하는 것인 듯 했다. 

      안내받은 창가 자리 테이블에는 밝은 회색 양복과 검은색 폴라티를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팔려서 내가 다가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조금 날카로운 인상에 머리가 짧고 턱이 조금 긴, 전체적으로 괜찮은 외모의 남자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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