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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an 26. 2024

좀 더 순진하게 (40)





     “저기, 안녕하세요. 혹시 박경수 씨 되시나요?”

     나는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말을 걸었다. 그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지어 내 얼굴도 보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재빨리 들고 있던 핸드폰을 안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오시느라 힘드셨죠. 우선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코트를 벗어 옆 의자에 걸어놓고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리를 꼬았다. 사실 다리를 꼬는 포즈 하며 서늘한 표정 같은 것에서 나는 조금 희진이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박경수라고 합니다. 그동안 형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예, 김민주예요.”

     “형이 괜히 부담스럽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형이 좀 막무가내라서요. 한번 마음을 먹으면 말릴 수가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냥 편하게 생각해주세요.”

     “아, 아니에요. 저도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어요.”

     몇 마디 나누어보니 그는 예의가 바르고 몸가짐이 단정한 남자였다. 말투도 서글서글하고 발음이 분명해서 나는 곧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누구나 호감을 가질 만한 사람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신상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경수는 현재 여의도에 있는 일식집에서 일식 요리사로 일하고 있었다. 전기공학을 전공했지만,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군대를 마치자마자 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었다. 그 뒤로 그곳에서 작은 일식집까지 열었었는데 형의 설득에 3년 전에 모두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는 형과 아홉 살 차이가 나는 데다가 형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노릇까지 해왔기 때문에 형의 말에는 거역할 수가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다가, 아차 하며 그렇다고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게 싫은 건 아니라고 쩔쩔매기도 했다.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경수는 나에게 퍽이나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아니, 어쩌면 신선한 것은 이 상황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소개로 낯선 남자를 만나는 건 나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고, 누군가와 이렇게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대화를 나누어본 것도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내 핸드폰에서 문자가 왔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무심코 핸드폰을 집어든 나는 소스라칠 만큼 놀랐다. 뜻밖에도 현기에게서 온 문자였다.

     [지금잠깐 만날수있을까요]

     나는 순간 목부터 손가락 끝까지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용건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혹시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나? 수연이가 그 일을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현기가 바보같이 제풀에 자백이라도 해버린 게 아닐까? 나는 급하게 통화해야 할 곳이 있다고 경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현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에요?”

     나는 다짜고짜 매섭게 외쳤다. 

     “지금 어디예요?”

     현기의 담담한 말투에 나는 더 화가 치밀었다.

     “회사 사람들하고 있어요. 무슨 일인데요?”

     “그럼 끝나고 전화 주세요. 집 근처에 가 있을게요. 신림동 맞죠?”

     “대체 무슨 일인데요?”

     “만나서 얘기하죠. 도착하면 연락 줘요.”

     현기는 짐짓 의젓하게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핸드폰을 두 손에 꼭 움켜 쥐고서 이를 갈았다. 대체 무슨 수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쥐 죽은 듯이 있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뻔뻔하게 전화를 걸어오다니 분통이 터졌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기셨어요?”

     한참 만에 자리로 돌아온 내게 경수가 물었다. 나는 미리 화장실에서 생각해낸 대로 말을 지어냈다. 

     “그게, 집안 어른 되시는 분이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가까운 친척은 아니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저, 너무 죄송한데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아니에요. 그럼 가보셔야죠.”

     “어떡하죠. 정말 죄송해요.”

     내가 당황한 나머지 허둥대며 냅킨으로 입술을 훔치고 있는데 경수가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저기, 오늘 어떠셨어요. 좀 지루했죠? 제가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아니에요. 별말씀을요. 식사도 맛있었고 다 좋았어요.”

      그가 혹시 내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없는 얘기를 둘러대며 자리를 뜨는 걸로 오해할까봐 나는 필요 이상으로 상냥하게 말했다. 

     “그런데 혹시 형이 저에 대해 딴 얘기는 안 하던가요?”

     “딴 얘기요? 아뇨. 없으셨는데요.”

     나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수연이와 현기의 얼굴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이 자리에 나오시기 전에 미리 알고 계셨어야 하는데, 형이 내 생각 해준답시고 민주 씨에게 말을 안 한 것 같아요. 속이려고 한 건 아닙니다.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기, 실은 제가 한 번 결혼에 실패했던 사람입니다. 4년 전에 이혼했고, 저, 딸도 하나 있는데, 일본에서 애 엄마가 키우고 있어요. 애 엄마가 일본 사람이라서요.”

     “아아, 네.”

     나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지금은 그 사실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렇게 말씀드려서, 좀 불쾌하시죠?”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들 살면서 이런저런 사정들이 있잖아요. 다 지난 일이구요.”

     그때 다시 한 번 내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신림동사거리 편의점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서 다리가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제가 이렇게 이혼 사실을 말씀드린 건, 솔직히 다음에 또 뵙고 싶어서입니다. 제가 다음에 다시 정식으로 저녁을 대접했으면 하는데요, 어떠세요?”

     나는 그가 다음 약속을 언급하자 크게 당황했다. 원래 계획대로 하자면 나를 퇴짜 놓아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지금은 그런 것들을 차근차근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경수가 이혼 얘기까지 꺼내는 바람에 내 머릿속은 한층 더 산만해졌다. 내가 머뭇거리자 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곤란하시죠? 안 그래도 상사의 부탁이라 거절 못하고 나오셨을 텐데, 거기다가 이혼남이라니까 황당하기도 하셨을 거구요. 너무 실례가 컸던 것 같네요. 설사 거절하시더라도 형한테는 제가 잘 말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저기, 염치없지만 한번 생각을 해보시면 안 될까요? 저는 민주 씨와 좀 더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데요.”

     그는 겸손하고 정중했다. 그것이 내 어깨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 순간 나는 순진한 중학생 여자애처럼 그런 것이 필요했다.  

     “네, 그럼, 연락 주세요.”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저, 그럼 제가 날짜를 잡아서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경수는 정말 기쁜지 환한 얼굴로 내게 말했고, 나는 행여나 얼굴을 찡그리게 될까 봐 애를 써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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