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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Feb 02. 2024

좀 더 순진하게 (41)




     경수는 나를 위해 택시를 잡아주고 직접 택시 문까지 열어주었다. 평소였다면 제법 으쓱한 재미가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오히려 번거롭기만 했다. 택시가 출발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현기에게서 받은 문자를 삭제했다. 그리고 가는 동안 내내 똑같은 상상을 되풀이했다. 현기와 함께 수연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상 말이다. 

     나는 택시에서 내린 후 편의점 안을 멀찍이서 살펴보았다. 그곳에 현기가 있었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창가 왼쪽 구석에 서서 무언가를 마시고 있었다. 남색 양복 차림에 검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있는 퉁퉁한 몸집이 영락없는 중년의 아저씨 같았다. 하지만 하얀 형광등 때문인지 오히려 얼굴은 어리게 보였다. 나는 현기가 나를 볼 수 있도록 편의점 유리창 앞으로 다가갔다. 현기는 별다른 반응 없이 마시던 것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어쩐 일이세요?”

     힐난하는 내 말투에 그는 잠시 말이 없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할 얘기가 있어서요. 저, 민주씨 집에 가서 잠깐 얘기 좀 할까요?”

     “그냥 근처 카페로 가죠.”

     “아니오. 집이 조용하고 편할 것 같은데요. 집으로 가요.”

     현기의 단호한 기세에 나는 놀랐다. 그것은 무례함을 넘어 협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싫다고 했다가는 내 옷깃이라도 낚아채서 움켜쥘 것 같은 남자 특유의 우격다짐이었다. 이런 난폭함은 근골의 발육에서 오는 것일까 성기의 발기에서 오는 것일까. 혹은 오히려 세상의 신호 체계를 감지하는 예민함일까? 나는 막연한 불안감과 궁금증에 휩싸여 순순히 현기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골목길을 따라 걸어 올라오는 내내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로 말하자면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집 안으로 들어와 불을 켜고 나자 나는 좀 창피해졌다. 가족과 희진이를 제외하고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은 현기가 처음이었다. 

     “뭐 마실 거라도 드려요? 커피나 홍차나, 아, 둥굴레차도 있고.”

     말하면서도 나는 코웃음을 쳤다. 

     “아니, 그건 됐고, 좀 앉아 봐요.”

     현기가 먼저 앉으며 타원형의 탁자 위를 손바닥으로 가만히 두드렸다. 나는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오늘 내가 여기 온 건, 다른 얘기가 아니라, 저기,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을 좀 해봤는데…….”

     나는 눈을 멀뚱히 뜨고 현기를 바라보았다. 상대방의 진의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나는 온전히 공손해져 있었다.

     “가끔, 만나면 어떨까요?”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거대한 데자뷰를 느꼈다. 아무런 맥락 없이 맥락을 만들어내는 비일상적인 비약의 힘. 그 때의 그 진한 홍차 향기가 금방이라도 코를 찌를 듯했다. 어째서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걸까. 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 기어들어가 남몰래 큰소리로 실컷 웃고만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에 그런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괜찮겠어요?”

     나는 물었다. 내가 듣기에도 경멸조였다.

     “뭐가요?”

     “수연이 말이에요.”

     “수연이요?”

     현기가 잠시 입맛을 다시는 동안, 현기를 사랑하느냐는 내 질문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사랑한다고 대답했던 수연이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나는 현기에게도 수연이를 사랑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다’, ‘아니다’ 둘 중 하나의 분명한 대답을 다그치고 싶었다. 이제 나에게는 그걸 물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현기가 고개를 들더니 내 얼굴을 살짝 비껴 보며 입을 열었다.

     “수연이는 알 수 없잖아요.”

     나는 그만 혀를 내둘렀다. 그것은 가장 식상하고 또 가장 악랄한 대답이었다. 세상의 어느 상식과 소양에 비추어 봐도 약혼자의 친구와, 혹은 친구의 약혼자와 내연관계가 되는 걸 이해받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현기의 말에도 일말의 일리는 있었다. 이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함으로 인해서 일어난 적이 없었던 수많은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대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괜찮잖아요. 수연이만 모르면.” 

     다시 한 번 강조하는 현기의 물음에 내가 정확히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우리는 잠시 후 침대 위에서 알몸으로 뒤엉켜 있었다. 목을 조르듯 아무렇게나 부둥켜안고서 전희도 없이 함부로 찔러 넣는 삽입에 나는 차라리 속이 후련했다. 현기와의 섹스는 참 대책이 없었다. 마음이 따라올 사이도 없이, 마음을 따돌릴 수 있을 만큼 간편한 육체의 신속함이 있었다. 나는 그저 두 다리를 높이 벌리고서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이것이 바로 ‘자연스럽다’는 것일까? 

     섹스가 끝난 뒤 현기는 내 옆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고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는 현기에게서 가만히 등을 돌렸다. 현기와 섹스 하는 동안 나는 수연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수연이에 대해서도, 수연이와 현기에 대해서도, 수연이와 나에 대해서도, 그리고 수연이에 대한 내 마음에 대해서도, 거기다 희진이까지도 똑똑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현기와 섹스를 했었고, 지금 또 한 번 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거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왜냐고?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콧바람을 내뿜었다. 왜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 차라리 무작정 돌을 던지고 욕을 퍼붓고 비난할지언정 왜냐고 묻는 건 적절치 않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아니고, 단지 ‘그리고’였다. 

     “이만 가볼게요.”

     섹스가 끝난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서 현기가 몸을 일으켰다. 어쩌면 그는 말없이 누워서 30분을 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내게 등을 돌리고 재빨리 옷을 주워 입는 그의 뒤태가 마치 뒤뚱거리며 고개를 숙이는 해마처럼 보였다. 그는 가방을 챙겨들고 나가려다 말고 탁자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번에 보여줬던 내 시인데, 읽어봐 줄래요?”

     언제 놓아두었는지 탁자 위에는 두툼한 두께의 누런 봉투가 있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현기 역시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나섰다. 나는 직사각형으로 날카롭게 각이 잡혀 있는 누런 봉투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이 일에 대해 나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 점은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책임이란 ‘해결’이나 ‘복구’, ‘후회’, ‘사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는 나의 삶이 예측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방향으로 휩쓸려가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용인하겠다는 의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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