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곡도 Feb 16. 2024

좀 더 순진하게 (43)





     “여기 가운데 이분이 우리 고모야. 예쁘게 생겼지? 아빠 말로는 동네에서 미스코리아 나가보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대. 근데 나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어. 교통사고로.”

     나는 지나치려던 사진을 새삼 다시 들여다보았다. 사진 한가운데에는 노란색 한복을 차려입고 옛날 스타일로 높이 틀어 올린 머리를 흰색 꽃으로 장식한 젊은 여자가 덧니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확실히 미인이었지만 죽었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그 곱고 행복한 웃음마저 핏기 없이 창백해 보였다. 아니, 그건 죽음의 암시 때문이 아니라 원래 사진의 본질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 사진이란 1000분의 1초의 두께로 압착한 박제가 아닐까? 그래서 박제의 유리 눈알로부터 시선을 피하게 되듯 우리는 사진 속 인물과도 제대로 눈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박제의 통통한 가죽 속을 꽉 채우고 있는 새하얀 솜처럼, 사진의 뒷면을 돌려보고는 그 하얗고 미끈한 평면에 몸서리친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냉랭한 포르말린 냄새를 풍기는 그것들을 집집마다 보물단지처럼 보관하고 있다니, 사진 앨범이야말로 - 예전에 유행했던 곤충이나 나비, 식물 표본 상자보다 더 - 가장 기괴한 박물관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나는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한눈에 나는 희진이를 알아보았다. 희진이 어깨에 수연이가 다정하게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나는 슬며시 그 사진을 내 앞에 끌어다 놓았다. 둘 다 교복 차림이었고 고등학생 시절로 보였다. 교복은 언젠가 내가 상상했던 갈색 체크무늬는 아니었다. (사실 그건 내 고등학교 때 교복이었다.) 그들은 하얀색 반팔 블라우스에 연회색 조끼와 연회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나란히 팔짱을 낀 두 사람의 얼굴에는 그 또래 특유의 장난기와 웃음이 가득했다. 수연이는 지금과 비슷한 단발머리였고 입술 한쪽 끝을 살짝 깨물고 있었다. 희진이는 얇은 은테 안경을 쓰고 생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내렸는데 내가 그녀에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머리 스타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희진이의 대학 시절 이전의 사진을 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사진 속의 희진이는 아직 앳되고 또 이미 아름다웠다. 그 미소에는 지금의 희진이에게서는 거의 사라진 천진함이, 멍하니 텔레비전을 볼 때나 가끔 스쳐 지나가는 순진함이 엿보였다. 나는 내가 알기 전의 두 사람을, 그리고 나를 알기 전의 두 사람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내게 1000년 전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나 없이 1000년 동안이나 함께 한 셈이었다.

     “아, 그건 우리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진이야.”

     수연이의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 그래?”

     “우리 학교 교복도 어지간히 촌스럽지? 무슨 시골 버스 터미널 경리도 아니고.”

     수연이는 웃으며 내 손에서 사진을 집어 갔다. 나는 저 당시가 희진이가 수연이에게 고백하기 전일까 후일까를 생각하느라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진 정리는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커다란 막대 사탕을 빨고 있는 두 살의 수연이, 파란색 멜빵바지를 입은 네 살의 수연이, 긴 머리를 세 갈래로 땋아 내린 아홉 살의 수연이, 팔에 붕대를 감은 열한 살의 수연이, 오빠와 낚시를 하고 있는 열여섯 살의 수연이,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눈물범벅이 된 열아홉 살의 수연이, 보라색 수영복을 입고 있는 스물한 살의 수연이, 희진이와 함께 초콜릿 케이크를 먹고 있는 스물다섯 살의 수연이, 현기와 함께 2인용 자전거를 타고 있는 스물여덟 살의 수연이, 바로 얼마 전 이 집에서 찍은 듯한 잠옷 차림의 수연이 등등 수백 명의 수연이들이 모두 세 권의 앨범 속으로 차곡차곡 사라졌다. 

     “와, 정리하고 나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네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아마 계속 구석에 처박혀 있었을 거야.”

     수연이가 남은 사진들 몇 장을 (수연이도 모르는 이들의 사진이라고 했다. 심지어 양복을 차려 입은 어떤 남자의 증명사진도 한 장 끼어있었다. 대체 왜 이 사진들이 자신의 사진과 섞여 있는지 알 수 없다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쓰레기통에 쓸어 넣으면서 말했다. 나는 쓰레기통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누군가의 사진들을 보며 잠깐 섬찟했다. 그리고 이것이 단지 구태한 미신적인 감상인지 아니면 마땅한 인격 존중의 연장인지 몰라 다소 혼란스러웠다. 

     정리한 앨범들을 다시 작은방에 가져다 놓은 뒤, - 딱히 출출하지 않은데도 - 수연이는 인스턴트 만두를 전자레인지에 쪄서 접시에 내왔다. 우리는 방금 전까지 빳빳한 사진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던 탁자에 앉아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만두를 먹었다. 만두는 맛이 괜찮았고 나는 조금 지루해졌다. 오후의 햇살이 1층에서부터 짙은 그림자를 천천히 끌어오고 있었다. 희진이와 함께였다면 섹스라도 했을 텐데, 나는 다시 그런 생각을 했다. 생각보다 수연이와 내가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잠깐씩 서로를 마주 보았는데, 실상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텅 빈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래. 우리 목욕이나 갈까?”

     수연이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목욕?”

     나는 태연하게 되물었지만 내심 당황했다.

     “요 앞에 목욕탕이 새로 문을 열었다고 광고하던데, 한번 가보고 싶었거든.”

     괴이한 일이었다. 나는 수연이가 나에 대해 여러 가지로, 그러니까 성 정체성이나 희진이와의 관계에 대해 분명 의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수연이의 제안에 다소 충격을 받았다. 

     “내가 원래 목욕탕 가는 거 되게 좋아해. 대전에서는 적어도 2주에 한 번씩은 꼭 갔었어. 그런데 서울에 온 뒤로는 아직 한 번도 못 가봤거든.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잘됐다. 전단지 사진 보니까 넓고 깨끗하더라고. 녹차탕, 황토탕, 허브탕도 있고 사우나 시설도 있대.”

     처음에는 농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수연이가 본격적으로 설득해 오자 나는 난감해졌다. 초등학교 이후로 나는 한 번도 공중목욕탕을 이용한 적이 없었다. 

     “희진이하고도 같이 목욕탕에 간 적 있어?”

     나는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희진이 얘기를 꺼냈다.

     “아니, 희진이는 공중목욕탕이 싫대. 요즘에는 집집마다 욕실이 있는데 왜 사람들이 아직도 공중목욕탕을 가는지 이해를 못하겠대. 뭐라더라, 그럼 대체 사생활이라는 게 남아 있냐는 거야. 게다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몸을 담갔던 물에는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펄쩍 뛰더라.”

     그건 매우 희진이다웠지만 (그리고 나도 희진이와 생각이 같았지만), 그럼 수연이 다운 건 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차라리 수연이에게 툭 터놓고 물어보고 싶었다. 희진이에 대해, 수연이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그 밖에도 궁금한 건 무엇이든 묻고 싶었다. 상징이나 비유를 들거나, 수식어로 꾸미거나, 장황하게 반복하거나, 인용을 하거나, 주석을 달거나, 인과관계를 뒤섞거나, 이야기를 꾸미거나, 돌려 말하지 않고, 털끝만큼의 변명이나 오해의 여지없이 모든 걸 간단명료하고 정확하게 말이다. 하지만 물론 그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모든 게 한 장의 사진으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증명사진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테니까. 





(계속)


                 

이전 12화 좀 더 순진하게 (4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